“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하얗게 빛나는 도끼날처럼 예리하고, 빙판을 깨뜨리는 굉음처럼 강렬하다. 얼음보다 차갑고, 결빙보다 단단하며, 쇠망치보다 뜨겁다. 달군 쇠를 모루 위에서 내리치는 대장장이 같다. 책에 관한 명언 중 이만큼 강한 인상을 주는 게 또 있을까.
카프카는 왜 책을 도끼에 비유했을까 [고두현의 인생명언]
이 멋진 문장은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편지 속에 나온다. 그는 21세 때인 1904년,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읽는 책이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쳐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책을 읽어야 할까?”라는 물음을 던진 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라고 답했다.

이런 표현이 나오게 된 배경도 그 속에 드러나 있다. 그는 “2주일 동안이나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답장을 보낸다”면서 그 이유를 “헤벨의 일기들(1800쪽에 달하는)을 단숨에 읽어 버렸다”고 밝혔다. 그 일기를 읽고 ‘마치 동굴에 갇힌 원시인이 공포에 질려 입구의 돌덩이를 치우려고 온 힘을 끌어모으는 것처럼’ 의식이 고양되고 예민해졌다는 것이다.

헤벨은 독일 극작가이자 시인인 프리드리히 헤벨(1813~1863)을 가리킨다. 그의 일기가 어땠길래 이처럼 강한 자극을 받았을까. 그는 사실주의 희곡을 완성한 근대 연극의 선구자다. 가난한 미장공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교양을 쌓고 법학 박사학위까지 땄지만, 우주의 불가해(不可解)에 대한 고민으로 번민하다 몇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인간 실존에 관한 고뇌의 흔적들을 22세 때부터 죽기 직전인 50세 때까지 일기에 촘촘히 기록했다. 인생의 비극이 어디에서 발원하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는 특유의 심리 해부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이 덕분에 그가 28년 동안 쓴 일기는 ‘최상의 문학사적 기념비’이자 ‘가장 진솔한 삶의 고백’으로 평가받고 있다.
카프카는 왜 책을 도끼에 비유했을까 [고두현의 인생명언]
카프카는 헤벨의 일기에서 슬픈 자화상을 발견했다. 그는 외로운 역외자요 낯선 이방인이었다. 체코에서 태어났지만 프라하 시민의 10%밖에 사용하지 않는 독일어를 썼다. 독일어가 모국어였지만 유대인이었고,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교 신앙은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그는 인종적, 언어적, 종교적으로 정체성 혼란을 겪어야 했다.

가정적으로도 힘겨웠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 사이에서 가부장적 폭력과 불안에 시달렸다.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날 구원이 필요했지만 “희망은 충분히, 무한히 많아. 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야”라며 막힌 출구 앞에서 그는 괴로워했다.

폐결핵으로 41세에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는 많은 글을 썼다. 그러나 문학적 가치에 회의를 느껴 발표를 주저하곤 했다. 죽기 전에는 여자 친구에게 두꺼운 원고 노트 20권을 불 속에 던져 달라고 부탁했다. 침대에 누워 불타는 원고를 지켜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생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도 남은 원고를 모두 태워달라고 유언했다. “막스, 네가 발견한 일기, 원고, 편지, 그림 등 다른 사람 것이든 내 것이든 읽지 말고 전부 태워 줘.” 하지만 친구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 덕에 <성>, <소송>, <실종자> 같은 작품들이 살아남았다.

그의 작품들은 사후 ‘세계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역작’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지금도 카프카의 시대만큼이나 불안하고 초조한 우리 시대의 독자에게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처럼 강렬한 울림을 주고 있다.

그가 퇴근 후 밤늦게까지 원고를 쓰던 작은 집이 프라하성 뒤편의 황금소로에 있다. 문틀 위 벽에 22라는 번지가 새겨진 이곳으로 카프카를 기리는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어느새 그의 탄생 140주년이다. 아, 내년이면 타계 100주년이 되는구나!

고두현 시인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