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연 칼럼] 강남 코인 납치사건 방조자들
최근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져 사회적 충격을 안긴 40대 여성 납치 살해 사건은 암호화폐(코인) 투자 실패가 부른 참극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소위 ‘김치코인’인 퓨리에버가 있다. 이 코인은 2020년 11월 2000원 선에서 코인거래소에 신규 상장한 뒤 불과 한 달 만에 1만354원까지 치솟았지만, 현재는 1원 안팎으로 99.9% 이상 폭락한 채 상장폐지를 앞두고 있다.

퓨리에버는 도대체 어떤 코인일까. 이를 알기 위해 코인 시장의 증권신고서 격인 백서를 열어 보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깨끗한 공기의 중요성을 경각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국회와 협력한다’는 사업 비전부터 그렇다. 난데없는 로봇 태권브이가 곳곳에 등장해 눈을 현혹하지만, 내용은 대학 리포트를 짜깁기한 듯 허접하기 짝이 없다. 코인 발행처와 설립자 실체는 물론 재정 상태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투명하다. 이런 백서를 기반으로 발행된 코인이 국내 3대 거래소 중 한 곳에 버젓이 상장돼 한때 시가총액이 2000억원에 육박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무분별한 상장을 통해 배를 불린 거래소에 1차 책임이 있지만 이를 방치 또는 방조한 정부 당국도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2017년 비트코인 1차 광풍 때부터 투자자 보호 문제가 꾸준히 제기됐다. 한국거래소, 한국예탁결제원, 증권금융회사 등으로 역할이 분리된 증권시장과 달리 가상자산 시장에서는 거래소가 상장에서부터 예탁, 매매, 결제 등 모든 업무를 수행했다. 부실 상장과 불공정거래 행위로 인한 이용자 피해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본 중의 기본인 백서에 대한 정보공개 기준조차 없어 투자자는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그런데도 당국은 “암호화폐는 법정화폐나 금융투자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투자자가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며 이용자를 보호의 테두리 밖에 방치했다. 한국 사람이 해외 페이퍼컴퍼니(서류상 회사)를 두고 만든 불량식품이 국내에 대거 유통되고 있는데도 당국은 팔짱만 낀 채 이를 사 먹는 소비자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 유럽연합(EU) 등이 가상자산을 투자상품과 비투자상품으로 분류해 규제기관을 달리하고, 감독기관을 지정해 이용자를 보호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사이 국내 코인 거래 참여자가 580여만 명으로 늘었지만, 한국에서만 거래되는 정체불명의 김치코인이 상장 코인의 절반 가까이 차지할 정도로 시장은 ‘쓰레기 투기판’으로 변질했다. 그렇게 단기간에 큰돈을 벌겠다는 탐욕이 사회 문제로 확산하고, 이를 노린 사기가 판치는 무법천지 사태를 방기한 셈이다. 주무 부처로 지정된 금융위원회를 비롯해 암호화폐 사업자의 이용약관을 조사해 시정조치를 해야 하는 공정거래위원회, 코인 관련 유사수신 등 온라인상에서 불법 정보를 차단하는 책임을 진 방송통신위원회, 관련 입법을 지원해야 할 국회 모두 직무유기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EU 의회가 최근 가상자산 범위와 유형을 토큰증권, 유틸리티토큰, 전자화폐토큰 등으로 구분해 규제 수준을 달리하고, 투자자 보호 내용 등을 담은 포괄적 규제 법안을 통과시켰다. 우리 정부와 국회도 루나와 위믹스 등 대형 사건이 터지자 뒤늦게 시세 조작에 대해 최대 무기징역까지 처벌하는 내용의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발의했다. 하지만 발행 공시 규제 등 투자자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조차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사후약방문식 처방으로는 제2, 제3으로 이어지는 코인 스캔들을 막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