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대표는 연쇄 창업가입니다. 첫번째 창업은 '디자인' 회사 였고 두번째 창업은 '기부' 플랫폼 입니다. 디자인과 사회문제 박 대표가 늘 천작하던 이 두가지 주제를 결합해 들고 나온 세번째 창업 아이템은 콘돔이었습니다. 좀 난데없지 않냐구요?

박 대표는 이 콘돔의 디자인과 기능을 바꾸면 건강한 성 문화를 다지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봤습니다. 남성 지향성의 마케팅 관행을 깨고 '여성을 위한 제품', '그러므로 여성이 스스럼 없이 살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 박 대표가 명문대 교수직을 때려치고 창업의 길에 다시 나선 이유입니다. '콘돔을 파는 여성 CEO' 박대표의 고군분투 현장을 한경 긱스가 찾아가봤습니다.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가 원통형 케이스에 든 콘돔 제품을 들고 있다. / 세이브앤코 제공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가 원통형 케이스에 든 콘돔 제품을 들고 있다. / 세이브앤코 제공
"다들 망한다고 했어요. 여성은 콘돔을 안 산다는 거죠."

여성 건강을 생각한 콘돔을 시장에 내놓은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사진)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 창업했다. ‘한국이라 안 된다’ ‘여성을 공략하면 안 된다’ 등 안 될 이유는 많았다. 세이브(SAIB)도 영어로 편견(BIAS)을 거꾸로 한 이름이다.

서울 대방동 스페이스살림 내 사무실에서 만난 박 대표는 부드럽지만 단단해 보였다. 5년 차 펨테크(Femtech·여성을 위한 기술) 스타트업 대표로서 각종 인터넷 '악플'이나 색안경을 끼고 쳐다보는 정부나 벤처투자(VC)업계의 시선에도 내성이 생긴 듯했다.

국내 콘돔 시장은 연간 500억 원이 채 안 된다. 이중 여성이 구매하는 비율은 1%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기준 콘돔 사용률은 15.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다. 총 진입 시장이 너무 작은 곳에서 ‘안 되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그가 줄곧 들은 이유다.

하지만 박 대표는 단호했다. 그는 “한국은 콘돔 사용률이 낮아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작은 것”이라며 “여성 소비자가 들어와서 시장이 같이 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 과제물이 창업 계기

세이브의 사업 아이디어는 한 학생의 과제물에서 비롯됐다. 박 대표가 미국 텍사스대 디자인학과 교수였을 때 사회문제를 해결할 만한 디자인 아이디어를 가져오라는 과제를 냈었다. 그때 한 여학생이 대학 의무실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콘돔을 가지고 '세이프 섹스'라는 조형물을 만들어 학생들이 금요일마다 파티하는 거리에서 가져가게 하자는 내용을 발표했다.

박 대표는 “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과제 발표를 듣는데 저 혼자만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여느 또래 한국인처럼 학교나 집에서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20대 후반이 됐을 때까지 콘돔을 직접 구입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자신을 돌보는 일에 무지했단 게 부끄러웠어요. 저 같은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싶었어요."

박 대표는 보수적인 가톨릭교 교육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친인척을 통틀어 사업가는 단 한명도 없다.

"자라면서 창업가 정신 같은 걸 배운 적은 없지만, 바쁘신 부모님 덕분에 독립적으로 컸던 게 창업을 결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박 대표의 부모는 그가 2018년 2월 세이브를 창업한 것도, 이듬해 교수직을 내려놓고 아예 한국에 들어온 것도 '사후'에 알았다. 간호학을 전공하신 어머니는 안전한 성생활의 중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꼭 내 딸이어야만 하니...”라며 어려운 창업의 길을 선택한 딸을 걱정했다.

말 그림 대신 틴케이스

사업 구상 초기엔 젠더(성) 중립적인 브랜드 디자인을 검토했다. 막상 시장 조사를 나가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시장에 있는 제품들은 야한 여자 사진이 있거나 번쩍이는 말 동상이 그려져 있는 식으로 거의 다 남성향 디자인이었어요. 반대로 여성들이 사서 가방에 넣고 다녀도 거부감이 없는 디자인으로 만들자고 결심했죠."

세이브 콘돔은 박 대표가 직접 디자인한 납작한 금속 케이스에 담겼다. 겉으로 보면 콘돔인지 알 수가 없다. 레드닷, 아이디에이, IF 등 세계 3대 디자인상을 석권했다. 콘돔 3개가 들어있는 제품 가격이 7900원으로 비싼 편이지만 지금까지 80만개가 팔렸다.
납작한 틴 케이스에 든 세이브 콘돔 제품
납작한 틴 케이스에 든 세이브 콘돔 제품

건강한 콘돔을 만들다

브랜드 디자인은 박 대표가 가장 잘 아는 분야였지만 제조 경험은 전무했다. 화학 성분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더군다나 유통은 바이어들과 술집에서 거래하는 '남초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동네였다.

"디자인과 제조업은 다른 세상인데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했어요. 그런데 두렵다기보단 배짱이 좋았던 거죠. 창업 하기까지 7~8개월 고민을 하면서 각 분야 전문가들을 소개받으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갔어요."

세이브 콘돔은 향료나 색소, 발암물질 등 유해 성분을 배제했다. 여성의 몸에 들어가는 제품인 만큼 건강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이브가 만든 다른 제품은 여성 윤활제와 여성청결제다. 지난해 5월 개발한 윤활제는 글리세린 대신 여성 질 건강에 좋은 식물성 유산균과 크랜베리 추출물을 활용한 원료 '크랜프로비'가 들어갔다. 크랜프로비는 한국과 미국에서 특허 출원했다. 올해 상반기엔 '제로 웨이스트' 제품인 고체형 여성 청결제를 출시했다. 세이브는 제품 수익의 10%를 여성 권리 강화를 위한 캠페인에 쓰고 있다.

지난해 말 국제 비영리단체 쉬러브스테크(She Loves Tech)가 주최한 제7회 세계 여성 스타트업 경진대회에서 50개국 4000여개 기업이 참여한 가운데 3위를 차지했다. 1위는 영국의 카드메딕, 2위는 미국의 리쓰리디가 올랐다.

디자이너에서 창업가로

박 대표는 문제가 있으면 그냥 못 넘어가는 천생 디자이너다.

“디자이너는 기능과 고객 경험을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가는 직업이잖아요. 제 성격도 그런 것 같아요.”

그는 스스로 사업가 스타일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세이브가 세 번째 창업인 연쇄 창업가다. 2008년 이화여대 시각디자인학과 4학년 때 브랜드 디자인 회사 '데어즈'를 공동 창업했고, 이어 기부를 일상화하는 '이 분의 일' 프로젝트의 공동 대표를 맡았다.

문제가 있으면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고야 마는 성격이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했고 다시 창업가로 이끈 셈이다.

박 대표는 “언젠가 다시 이 분의 일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를 미국 유학 가서 진행하다 중도에 그만둔 것이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

당시 이 분의 일 팀은 어느새 스타트업 신에서 잘 나가는 대표 선수들이 됐다. 개인 간(P2P) 핀테크 업체 렌딧의 김성준 대표는 박 대표와 공동 대표였고, 김서준 해시드 대표는 비즈니스 디렉터였다. 여가 취미 플랫폼 프립의 임수열 대표도 이 분의 일 프로젝트의 멤버였다.

곳곳에 편견

여성 소비자가 많은 미국 대신 한국 시장을 선택한 만큼 어려움은 많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콘돔을 안 사본 사람을 사게 만들려면 얼마나 어려운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하겠어요. 국내 콘돔 시장이 커지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각오하고 시작했어요."

곳곳에서 편견과 부딪혔다. 미국 학교에선 학생들에게 콘돔을 나눠주고 있지만 국내에선 다른 세상 얘기다. 박 대표가 중고등학교 양호교사 모임에서 무료로 콘돔을 나눠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오히려 학교가 반대해 무산됐다.

콘돔은 성인용품이 아닌 의료기기다. 식품의약처 허가를 받은 피임 도구임에도 인터넷 포털에서는 청소년 유해 정보로 분류하고 있다. 요철식, 약물 주입형 등 기능성 콘돔에 대해 여가부가 1997년부터 청소년 유해 물건으로 지정하고 있어서다.

“성인용품이 아닌데도 청소년들이 편의점에서 콘돔을 사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에요. 사회가 ‘콘돔은 청소년이 사면 안 되는 물건’이라고 몰고 가니 ‘비닐 콘돔’ 같은 사건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요.”

변화하는 MZ세대

하지만 분위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는 “MZ(밀레니얼+Z세대)를 중심으로 성 건강에 대한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며 “창업 초기엔 악플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처음 콘돔을 사봤다’ ‘성년의 날을 맞아 딸을 위해 샀다’는 댓글을 보며 힘을 받는다”고 했다.

창업 초기 콘돔 제조공장에 가서 향료나 유해 성분을 빼달라고 하면 '여자애가 뭘 안다고 까다롭게 구느냐'는 반응이었다.

"망할 거라고 하셨던 분들조차 발주를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여성을 공략한 콘돔이 팔린다는 걸 이해하세요. 설득 당하신 거죠."

하반기 미국 아마존 입점

1990년대까지 한국은 콘돔 생산 1위 국가였지만 지금은 말레이시아 태국 등에 밀린 상태다. 세이브는 돈이 더 들더라도 한국 제조를 고집한다.

박 대표는 “한국의 화학제조업 기술력은 세계 1위로 ‘메이드인 코리아’가 같은 힘이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K뷰티의 한 맥락으로서 K콘돔이 글로벌 시장에서 갖는 경쟁력을 가질 것이란 설명이다. 글로벌 콘돔 시장은 2023년 111억달러(약 14조원) 규모로 추정된다.
글로벌 콘돔 시장 추이 / 출처: 스태티카
글로벌 콘돔 시장 추이 / 출처: 스태티카
콘돔은 의료기기라 해외 진출시 각국 식품의약처(FDA) 승인을 받아야 한다. 승인받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심사비도 수천만원에 이른다. 세이브가 직구 형태인 크로스보더 온라인 판매를 먼저 선택한 이유다.

박 대표는 "크로스보더 판매로 30개국에 세이브 콘돔을 판매하면서 시장 검증을 했다"며 "미국과 대만 FDA 승인을 거쳐 하반기 공식 진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세이브는 아마존 입점을 시작으로 편집숍을 중심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해외 진출 순간부터 공급망 관리가 중요하더라고요. 드럭스토어 월마트 같은 대규모 유통체인은 재고 대응이 쉽지 않아요. 재고가 없으면 벌금을 물기 십상이에요. 그래서 브랜드 입소문을 내기 수월한 패션 편집숍을 먼저 타진했죠."

세이브는 올가을 시리즈 A 라운드를 진행해 연구개발과 해외 진출을 위한 자금을 조달할 예정이다. 공동 창업했던 데어즈가 초기 투자금을 댔다. 이어 2019년 데브시스터스벤처스, 미국 액셀러레이터 500스타트업이 시드 투자에 참여했다.

테헤란로가 아니라 대방동?

세이브는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운영하는 스페이스살림의 입주기업이다.

“주변에서 네 분이나 이곳을 추천해 주셨어요. 국내 최초로 여성 창업가를 위한 공간이 생기는데 여성을 위한 제품을 만드는 세이브가 입주해 의미가 남다른 것 같아요."

강남 테헤란로에 사무실이 있어야 투자를 잘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대방동에 위치한 이곳을 선택했다. 연간 임대료 1억원 비용을 아껴서 좋은 사람을 한명이라도 더 뽑는 게 낫겠다는 계산도 깔려있다.

2018년 두 명이 함께 시작한 회사는 2019년 3명, 2020년 5명, 2021년 지금의 8명으로 늘었다. 모든 직원은 여성이다. 박 대표는 “세이브의 미션에 얼마만큼 공감하는지가 중요한 채용 요건”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무리하게 몸집을 키우기보단 내실 있는 성장을 추구하는 편이다. 매출을 J커브 모양으로 늘리기 위해 퍼포먼스 마케팅을 쓰거나 자극적인 메시지를 던지지도 않았다.

"세이브는 저의 인격체 같은 브랜드에요. 아이를 키우듯 브랜드가 잘 키우고픈 욕심이 많죠. 세이브를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브랜드로 키우는 게 목표입니다.”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가 납작한 금속 케이스에 든 콘돔 제품을 들고 있는 모습 / 세이브앤코 제공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가 납작한 금속 케이스에 든 콘돔 제품을 들고 있는 모습 / 세이브앤코 제공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