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반도체 '초격차'만으론 부족하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와 인텔의 시가총액을 합친 것보다 큰 반도체 회사가 등장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당시 엔비디아의 위상은 미약했다.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인 그래픽처리장치(GPU)는 픽셀의 색을 구현하기 위해 연산 작업을 하는 칩으로, 중앙처리장치(CPU)의 보조 장치 정도로 인식됐다. 반도체 산업은 CPU의 강자인 인텔이 지배하고 있었다.

변화의 시작은 엔비디아가 한 대학원생의 연구에 주목하면서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이안 벅(현 엔비디아 부사장)은 GPU의 병렬컴퓨팅 기능을 활용해 컴퓨터의 연산 성능을 높이는 이른바 ‘가속 컴퓨팅’을 연구하고 있었다. 엔비디아는 그의 연구를 지원했고, 벅은 이를 통해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인 ‘쿠다(CUDA)’를 개발했다.

엔비디아를 바꾼 대학원생들

쿠다는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정보기술(IT) 기업들은 “그래픽카드를 활용해 대규모 연산을 할 만한 거리가 뭐가 있느냐”고 반응했다. 그런데도 엔비디아는 “언젠간 미래를 바꿀 플랫폼이 될 것”이라며 매년 수십억~수백억원을 유지 관리에 쏟아부었다.

진흙 속에 묻혀 있던 쿠다가 발견된 것은 개발 후 6년이 지나서였다. 2012년 캐나다 토론토대 대학원생인 알렉스 크리제프스키는 인공지능(AI)이 이미지를 얼마나 잘 식별하는지를 겨루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그는 쿠다를 이용해 연산 속도를 끌어올리는 방법을 고안했다. “장비에 집착하지 마라”는 교수의 꾸지람에도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천착했다. 엔비디아 GPU에 쿠다를 적용해 1주일간 컴퓨터를 학습시켰다.

그 결과는 AI의 역사를 바꿨다. 이전까지 이 대회 우승자의 이미지 인식률은 75%를 밑돌았는데 크리제프스키가 주축이 된 알렉스넷팀의 인식률은 84%까지 치솟았다. 크리제프스키는 우승 직후 “마음껏 가져다 쓰라”며 연구자료를 공개했다. 그래픽 처리용 칩이던 GPU의 위상이 CPU를 넘어 AI·블록체인 등 미래 산업을 위한 연산처리 장치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산학연을 아우르는 혁신 생태계가 맞물려 작동해 반도체의 업(業)을 바꾼 것이다. 거액을 들여 인재들을 끌어모으고 대기업에 자금을 쏟아붓는 중국식 반도체 육성으로는 불가능했다.

반도체 혁신 생태계를 키우려면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모처럼 보여준 반도체 육성 의지는 참 반갑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초격차’를 만들겠다며 강도 높은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인프라 증설과 생산 능력 극대화, 관련 학과 정원 확대, 세액 공제 등 나열되고 있는 정책들이 글로벌 혁신 생태계의 패러다임과 맞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이기려면 이제 ‘규모의 경제’나 ‘초격차’를 넘어서야 한다. 미래 산업 변화에 따라 AI 반도체나 자율차 센서 등 새로운 업을 만들어내는 게 필요하다. 선도 기업 일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글로벌 GPU 1위 회사조차 새로운 GPU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20년 가까운 시간이 들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문재인 정부의 10년짜리 시스템반도체 전략은 아쉽다. 새 정부는 20~30년의 중장기 계획을 마련하고 3년이나 5년 단위 기본계획을 세워 정책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정책에서 핵심은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분야 인재들을 키워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 인재들이 기초연구에 나서고, 모험하고, 그 성과를 공유하는 환경이 혁신 생태계의 한축으로 단단히 자리 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