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클래식 덕후' 하루키의 플레이리스트
‘레이코 씨는 책을 읽으면서 FM 방송으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고 있었다. 사람 그림자 없는 초원의 끝에서 브람스가 울려 퍼지는 것도 꽤 멋진 일이었다. 3악장의 첼로 멜로디를 그녀는 휘파람으로 따라 했다. “바크하우스와 뵘” 그녀가 말했다. 옛날에 이 레코드를 닳아 버릴 만큼 들었어. 정말 닳아버리기도 했고.’

무라카미 하루키(73)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민음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하루키 소설에는 클래식 음악이 자주 등장한다. 주로 인물 심리와 취향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기사단장 죽이기》(문학동네)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는 아예 작품의 모티브가 됐다.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는 하루키 소설 속 클래식 세계의 원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음반 수집가로도 유명한 하루키가 60여 년 동안 모은 1만5000여 장의 아날로그 레코드(LP판) 가운데 486장의 클래식 레코드를 소개한다. 대부분이 1950~1970년대 중반에 제작된 새까만 바이닐 디스크다. 명반이나 희귀본보다는 중고 가게에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 음반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책에는 1.5쪽 남짓한 분량의 짧은 에세이 100편이 수록됐다. 각 편은 한 곡에 대해 소장 앨범 네다섯 장을 함께 소개한다. 본격적인 음반 비평이 아니다. 음반을 어떻게 사게 됐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곡해설, 연주자·지휘자 정보와 함께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 대해 루돌프 제르킨의 앨범 2종과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앨범 3종을 다루는 식이다. 제르킨(피아노)과 조지 셀(지휘)이 녹음한 1966년 앨범은 “양자의 불꽃 튀는 경쟁이 건설적이고도 근사하다”고 했다. 노년의 루빈스타인(피아노)과 유진 오르먼디(지휘)가 함께한 1971년 음반은 “차분하고 묘미 있는 연주”라고 호평했다. 아쉽게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빌헬름 바크하우스(피아노)와 칼 뵘(지휘)의 앨범은 없다. 레이코처럼 하루키도 그 레코드를 닳아 버릴 만큼 들어서 정말 닳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루키 팬이라면 로시니 ‘도둑까치’ 서곡, 슈만 ‘사육제’ 등 소설 속 음악에 대한 작가의 음반 편력이 흥미로울 수 있다. 클래식 애호가라면 남다른 안목과 독특한 취향을 지닌 하루키의 해설과 감상을 통해 곡과 음반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도 있다. 여기에 하루키 에세이 특유의 입담과 유머, 소소한 일상이 곁들여져 읽는 재미를 더한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