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 주둔→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기지
광복후 주한미군 주둔…1990년 용산기지 이전 한미 합의
[대통령실 용산 이전] '금단의 땅'에서 정치 1번지로 변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을 공식화함에 따라 '광화문 시대'가 막을 내리고 '용산 시대'가 열리게 됐다.

인왕산에서 안산으로 뻗어내린 서울 백호 지맥의 한 줄기가 만리재와 청파동을 거쳐 한강까지 이어지는데 그 형상이 용과 비슷해 이 일대를 용산(龍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경복궁이 있는 광화문에서 한강으로 이동하는 길목인 용산은 조선 시대에는 물산의 집하장이었다.

서울의 노른자위 같은 용산 땅은 일찌감치 군사적 요충지로 외세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 말에 몽골군이 용산 일대에 병참기지를 뒀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군이 용산 일대에 주둔하기도 했다.

용산에 본격적으로 외국 군대가 주둔하게 된 건 조선 말이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했고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상륙한 곳도 용산이었다.

용산이 일반인에게 '금단의 땅'이 된 것은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용산에 자리를 잡았고 한일의정서를 내세워 용산 일대 300만평(약 1천만㎡)을 군용지로 강제 수용했다.

이후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용산 일대에는 일본군의 주요 군사시설이 속속 들어섰다.

1910년 8월 경술국치와 함께 용산기지에 보병 15개 중대가 배치됐고 1921년에는 용산기지에 20사단이 편성됐다.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용산기지는 바로 국민의 품에 돌아오지 못했다.

광복 이후 미 7사단이 인천으로 상륙한 뒤 용산기지에 진주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용산으로 이전했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다시 미군이 주둔했다.

1952년 정부가 용산 기지를 미국에 공여했고 이후 미 8군 사령부가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용산은 주한 미군 부대의 근거지가 됐다.

외국군 주둔의 역사로 점철된 용산은 1990년 6월 한미 정부가 용산기지를 이전하는 내용의 기본합의서와 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 새 전기를 맞는다.

2003년 5월 한미 정상이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을 합의한 데 이어 2005년 10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용산기지의 국가공원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용산에는 외국 군대를 따라 이국의 문물도 함께 들어왔다.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려고 이주한 중국 상인들이 부대 인근에 자리 잡은 것이 우리나라 차이나타운의 기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기지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며 일본인 거리가 생겨났고 미군이 진주한 뒤에는 인근 이태원에 이들을 상대로 한 상가와 환락가가 조성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