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탄소 열풍에 멈춘 ‘고도화 설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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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품질의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뽑아내는 고도화설비 경쟁이 움츠러들고 있다. 친환경·탈탄소 트렌드로 원유 정제 산업이 위축된 탓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 수조 원대 투자를 단행해 온 국내 정유사들은 대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화학사와의 합종연횡으로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나서기도 한다
[한경ESG] ESG NOW
정유업계가 20여 년간 서로 1위를 차지하기 위해 진행해온 정유 설비 고도화 경쟁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국내 정유 ‘빅 4’가 저품질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 경유 등을 뽑아내는 고도화 설비에 수조원대 투자를 단행한 것은 4년 전이 마지막이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열풍으로 원유 정제 산업이 위축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움츠러든 투자가 되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고도화 설비란 값싼 저품질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 경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뽑아내는 설비를 말한다. 고도화율이 높을수록 배럴당 정제 마진이 높아지고 수익성이 증대된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국내 정유사들은 고도화율을 높이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고도화율 1위를 차지하기 위해 앞다퉈 관련 설비를 증설했고, 수조원대의 투자도 과감히 진행했다.
국내 정유사 고도화율은 세계적 수준
업계에 따르면, 에쓰오일은 2011년부터 2018년까지 고도화 설비 투자에 6조3000억원을 썼다. GS칼텍스는 2013년까지 5조원을 투자했다. 현대오일뱅크와 에쓰오일 역시 1조~2조원대 투자에 나섰다. 그 덕분에 국내 정유사들의 고도화율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이다. 이날 기준 현대오일뱅크의 고도화율은 40.6%, GS칼텍스 34.4%, 에쓰오일 33.8%, SK(울산) 24.9%다. 일본과 중국 정유사들은 20% 초반대,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는 10%대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최근 친환경과 탄소중립 이슈가 부상하면서 고도화 설비 투자가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석유 제품이 순익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도 투자를 꺼리는 요인 중 하나다. 지난해 3분기까지 정유 4사의 정유 부문 영업이익률은 2~3% 선이다. 현대오일뱅크는 정유 부문에서 14조원의 매출과 3649억원의 영업이익을, GS칼텍스는 18조원의 매출과 7885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고도화 설비에 투입하는 원료인 벙커C유 가격도 오름세다. 지난해 1월 배럴당 49.98달러였던 벙커C유 가격은 연말엔 69달러 선까지 상승했다. 벙커C유 가격이 비싸질수록 고도화 설비의 수익률이 떨어진다.
정유업계는 대안으로 석유화학 제품 사업을 꼽고 있다. 친환경·탈탄소 트렌드에 부합하면서 이익률도 높다. 실제로 정유사와 석유화학사가 손잡는 사례도 늘고 있다. 정유사는 석유화학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혀 안정적 수익 기반을 갖추고, 석유화학사는 원유 부산물을 활용해 원가 경쟁력을 높이는 ‘윈윈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국내 정유업체와 석유화학업체 간 최초 합작사인 현대케미칼의 중질유 분해 복합설비(HPC) 공장은 2월경 상업 생산에 들어간다. HPC 프로젝트는 정유사의 부산물로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해 원가를 낮췄다는 데 의미가 있다. HPC는 원유 찌꺼기인 중질유분을 원료로 사용한다. 나프타를 원료로 쓰는 기존 설비와 달리 저렴한 탈황중질유 등을 활용할 수 있어 원가를 20~30% 낮출 수 있다. 충남 서산에 있는 HPC가 본격적으로 가동하면 연 85만 톤의 폴리에틸렌(PE)과 50만 톤의 폴리프로필렌(PP)이 생산될 예정이다. PE와 PP는 ‘석유화학의 쌀’로 불린다. 석유화학사업 진출 초기 정유사들이 원유를 정제해 나오는 나프타만 취급했다면 이후 방향족 화합물, 벤젠·톨루엔·자일렌(BTX), 올레핀 등으로 제품군을 넓혔다. HPC가 생산하는 PE와 PP도 대표적인 올레핀 계열 제품이다.
정유사와 화학사의 합종연횡 늘어
롯데케미칼은 2019년 7월 GS에너지와 합작해 롯데GS화학을 설립했다. 신규 공장을 짓고 있으며 완공 시 비스페놀A(BPA) 20만 톤, 페놀 35만 톤 등을 생산할 예정이다. GS칼텍스도 석유화학 설비 투자를 지속적으로 추진 중이다. 2조7000억원을 투자해 전남 여수에 43만m2 규모로 지은 올레핀 생산시설(MFC)이 대표적이다. 시험 가동 중이며 연간 생산 능력은 에틸렌 75만 톤, PE 50만 톤이다. 회사 관계자는 “올레핀 사업 진출은 장기적 성장 전략”이라며 “다양한 다운스트림 사업으로 확장해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구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정유사 입장에선 고도화 설비 투자를 무조건 중단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직까지 국내 정유사 매출의 70~80%가 정유 부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원유 수입처 다변화를 위해서라도 고도화 설비는 필요하다. 고도화율이 높아야 품질이 낮은 중남미산 원유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3년간 국내 정유사들의 원유 수입 지형도는 크게 달라졌다. 현대오일뱅크가 중동에서 들여오는 원유 비중은 2019년 42.4%에서 2021년 25.9%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GS칼텍스 역시 같은 기간 중동 수입 비율을 35%가량 줄였다. 대신 멕시코 등 저품질 아메리카산 비중이 높아졌다. 현대오일뱅크는 2019년 45%에서 2021년 65.3%까지, GS칼텍스는 18.2%에서 25.3%까지 올렸다. SK이노베이션은 아프리카와 유럽산 원유 비중을 2019년 2%에서 2011년 11%까지 확대했다.
중동산 원유 의존도를 낮추고 저품질 원유로 수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고도화 설비는 필수다. 그렇다고 탈탄소 열풍 속에서 석유화학 설비만큼 의미 있는 투자를 하기도 어려워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정유업계는 신규 투자보다는 유지·보수에 힘쓰며 후일을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ESG 경영 가속화로 정유산업이 어려워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단시일 안에 ‘파이’가 줄 가능성도 높지 않다”며 "ESG가 가속화될수록 세계 580여 개 정유공장 중 문 닫는 공장이 빠르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 수준에서 고도화 설비를 유지하며 후일을 도모한다는 것이 국내 정유업체의 공통된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남정민 한국경제 기자 peux@hankyung.com
고도화 설비란 값싼 저품질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 경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뽑아내는 설비를 말한다. 고도화율이 높을수록 배럴당 정제 마진이 높아지고 수익성이 증대된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국내 정유사들은 고도화율을 높이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고도화율 1위를 차지하기 위해 앞다퉈 관련 설비를 증설했고, 수조원대의 투자도 과감히 진행했다.
국내 정유사 고도화율은 세계적 수준
업계에 따르면, 에쓰오일은 2011년부터 2018년까지 고도화 설비 투자에 6조3000억원을 썼다. GS칼텍스는 2013년까지 5조원을 투자했다. 현대오일뱅크와 에쓰오일 역시 1조~2조원대 투자에 나섰다. 그 덕분에 국내 정유사들의 고도화율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이다. 이날 기준 현대오일뱅크의 고도화율은 40.6%, GS칼텍스 34.4%, 에쓰오일 33.8%, SK(울산) 24.9%다. 일본과 중국 정유사들은 20% 초반대,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는 10%대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최근 친환경과 탄소중립 이슈가 부상하면서 고도화 설비 투자가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석유 제품이 순익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도 투자를 꺼리는 요인 중 하나다. 지난해 3분기까지 정유 4사의 정유 부문 영업이익률은 2~3% 선이다. 현대오일뱅크는 정유 부문에서 14조원의 매출과 3649억원의 영업이익을, GS칼텍스는 18조원의 매출과 7885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고도화 설비에 투입하는 원료인 벙커C유 가격도 오름세다. 지난해 1월 배럴당 49.98달러였던 벙커C유 가격은 연말엔 69달러 선까지 상승했다. 벙커C유 가격이 비싸질수록 고도화 설비의 수익률이 떨어진다.
정유업계는 대안으로 석유화학 제품 사업을 꼽고 있다. 친환경·탈탄소 트렌드에 부합하면서 이익률도 높다. 실제로 정유사와 석유화학사가 손잡는 사례도 늘고 있다. 정유사는 석유화학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혀 안정적 수익 기반을 갖추고, 석유화학사는 원유 부산물을 활용해 원가 경쟁력을 높이는 ‘윈윈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국내 정유업체와 석유화학업체 간 최초 합작사인 현대케미칼의 중질유 분해 복합설비(HPC) 공장은 2월경 상업 생산에 들어간다. HPC 프로젝트는 정유사의 부산물로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해 원가를 낮췄다는 데 의미가 있다. HPC는 원유 찌꺼기인 중질유분을 원료로 사용한다. 나프타를 원료로 쓰는 기존 설비와 달리 저렴한 탈황중질유 등을 활용할 수 있어 원가를 20~30% 낮출 수 있다. 충남 서산에 있는 HPC가 본격적으로 가동하면 연 85만 톤의 폴리에틸렌(PE)과 50만 톤의 폴리프로필렌(PP)이 생산될 예정이다. PE와 PP는 ‘석유화학의 쌀’로 불린다. 석유화학사업 진출 초기 정유사들이 원유를 정제해 나오는 나프타만 취급했다면 이후 방향족 화합물, 벤젠·톨루엔·자일렌(BTX), 올레핀 등으로 제품군을 넓혔다. HPC가 생산하는 PE와 PP도 대표적인 올레핀 계열 제품이다.
정유사와 화학사의 합종연횡 늘어
롯데케미칼은 2019년 7월 GS에너지와 합작해 롯데GS화학을 설립했다. 신규 공장을 짓고 있으며 완공 시 비스페놀A(BPA) 20만 톤, 페놀 35만 톤 등을 생산할 예정이다. GS칼텍스도 석유화학 설비 투자를 지속적으로 추진 중이다. 2조7000억원을 투자해 전남 여수에 43만m2 규모로 지은 올레핀 생산시설(MFC)이 대표적이다. 시험 가동 중이며 연간 생산 능력은 에틸렌 75만 톤, PE 50만 톤이다. 회사 관계자는 “올레핀 사업 진출은 장기적 성장 전략”이라며 “다양한 다운스트림 사업으로 확장해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구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정유사 입장에선 고도화 설비 투자를 무조건 중단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직까지 국내 정유사 매출의 70~80%가 정유 부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원유 수입처 다변화를 위해서라도 고도화 설비는 필요하다. 고도화율이 높아야 품질이 낮은 중남미산 원유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3년간 국내 정유사들의 원유 수입 지형도는 크게 달라졌다. 현대오일뱅크가 중동에서 들여오는 원유 비중은 2019년 42.4%에서 2021년 25.9%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GS칼텍스 역시 같은 기간 중동 수입 비율을 35%가량 줄였다. 대신 멕시코 등 저품질 아메리카산 비중이 높아졌다. 현대오일뱅크는 2019년 45%에서 2021년 65.3%까지, GS칼텍스는 18.2%에서 25.3%까지 올렸다. SK이노베이션은 아프리카와 유럽산 원유 비중을 2019년 2%에서 2011년 11%까지 확대했다.
중동산 원유 의존도를 낮추고 저품질 원유로 수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고도화 설비는 필수다. 그렇다고 탈탄소 열풍 속에서 석유화학 설비만큼 의미 있는 투자를 하기도 어려워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정유업계는 신규 투자보다는 유지·보수에 힘쓰며 후일을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ESG 경영 가속화로 정유산업이 어려워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단시일 안에 ‘파이’가 줄 가능성도 높지 않다”며 "ESG가 가속화될수록 세계 580여 개 정유공장 중 문 닫는 공장이 빠르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 수준에서 고도화 설비를 유지하며 후일을 도모한다는 것이 국내 정유업체의 공통된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남정민 한국경제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