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우 작가의 ‘서천’
이길우 작가의 ‘서천’
한국화가 이길우(54·중앙대 한국화과 교수)는 자신의 작품을 말할 때 그린다는 표현 대신 ‘태운다’고 한다. 향불로 한지를 지져서 만들어낸 수많은 구멍을 통해 점묘화처럼 대상을 표현하는 독창적인 작업 방식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그의 그림은 연한 색의 색면추상화 같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향불 자국과 배접한 한지의 색이 내는 형상이 담백하면서도 깊이있는 멋을 연출한다. 종이를 태워 사라진 자국이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내는 소멸과 생성의 조화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이 작가의 개인전 ‘108&stone’이 열리고 있다. 그의 ‘향불 회화’ 35점을 펼친 전시다.

이 작가는 직접 염색한 한지와 신문 등을 콜라주해 화면을 구성한 뒤 향불 자국을 낸 한지를 중첩해 화면을 구성한다. 향불 자국은 100호 사이즈를 기준으로 5만 개. 작업 시간은 평균 한 달이 넘는다. 그는 “단 한 번의 실수가 작품 전체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다”며 “하지만 그만큼 온 정성을 쏟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했다.

그의 독특한 작품은 영국 사치갤러리 전시와 독일 ZKM미술관 아시아 100인전, 체코 프라하 비엔날레 등을 통해 세계 각국에 소개된 바 있다. 알 왈리드 빈 탈랄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와 중국 배우 판빙빙이 그에게 초상화 제작을 의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작가가 지금의 작업 방식을 고안해낸 건 2003년. 한국화의 특징을 살리는 표현법을 고민하며 산책하던 중 우연히 은행나무를 올려다봤는데, 나무에 붙어 있는 잎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광경에서 까맣게 그을린 무수히 많은 점이 떠올랐다. 그는 “작업실로 달려가 향불로 한지를 태워 구멍을 내봤더니 시공간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며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매개체라는 향불의 의미와도 어울렸다”고 말했다.

“향불 회화를 하기 전 무명 작가 시절에는 여러 어려움이 많았어요. 당시 아내가 가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속옷 가게를 했는데, 매일 제 성공을 기원하며 저 몰래 108배를 올렸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죠. 제목의 108은 그런 가족의 사랑을 뜻하는 겁니다. stone은 길가의 일상적인 소재를 예술로 바꾸겠다는 예술가로서의 의지를 담은 단어예요.”

전시장에서는 가족에 대한 사랑, 일상의 풍경 등 소박한 소재를 은은한 색으로 표현한 그의 향불 회화들을 만날 수 있다. ‘관객’ 시리즈는 아들과 함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관람하러 가서 막간에 본 풍경을, ‘Cafe’ 시리즈는 작가가 가본 세계 각지의 카페를 표현한 작품이다. ‘모자상’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렸다.

이홍원 아트뮤지엄 리 학예실장은 전시평을 통해 “작가는 근작에서 동양화 특유의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표현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오묘한 조화와 깊이있는 조형성이 탄생했다”고 했다. 전시는 다음달 4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