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라희 前 리움관장의 '몰래 한 제주사랑'
.제주 올레길은 트레킹 문화의 조상격으로 불린다. ‘규슈 올레’ ‘몽골 올레’ 등이 모두 여기서 비롯됐지만 제주의 불모지를 걷는 길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후원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제주 올레길이 세계적 관광지가 된 배경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모친인 홍라희 전 리움 미술관장의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10년 이상 제주올레길을 남몰래 후원한 홍 전 관장의 누적 기부금만 3억원에 육박한다.

14일 제주올레재단에 따르면 홍 전 관장은 2007년부터 2019년까지 매월 재단에 정기후원을 펼쳤다. 개인 비용을 들여 월 200만원씩 연간 2400만원을 후원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이 정확한 기부내역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단순 계산으로도 12년간 2억8800만원가량을 후원한 셈이다.

비영리 사단법인인 제주올레재단은 제주의 자연 속을 걸으면서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취지로 2007년 출범했다. 개인과 기업 등에서 후원금을 받아 방문객들이 갈 만한 올레길을 개척하고, 유지 보수하는 게 주된 활동이다. 홍 전 관장은 ‘걷기를 통한 치유’라는 올레길 취지에 공감해 재단 설립 초기부터 후원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단 관계자는 “홍 전 관장이 직접 제주도에 내려와 올레길을 걸어보며 후원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홍 전 관장의 제주도 사랑은 각별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귀포 섭지코지에는 홍 전 관장의 친정인 중앙그룹이 운영하는 휘닉스 제주 섭지코지 리조트도 있다. 이곳에서 운영하는 유민미술관은 홍 전 관장의 부친인 홍진기 전 법무부 장관의 호인 ‘유민’에서 비롯했다. 홍 전 관장은 재단 측에 올레길 코스에 휘닉스리조트 부지를 포함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재단 관계자는 “인위적으로 개발하지 않은 자연을 걷는다는 취지 때문에 제안을 거절했지만 홍 전 관장은 이후에도 후원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홍 전 관장은 2011년부터는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리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브랜딩해 판매하는 ‘무릉외갓집’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연회비 43만원가량을 내면 주민들이 재배한 제철 채소를 매월 배송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수입이 들쭉날쭉한 농민들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얻으면서 질 좋은 농산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기획됐다.

2010년에는 제주돌문화공원을 방문한 뒤 감명받았다며 기부금을 쾌척했다. 홍 전 관장은 이곳에 있는 설문대할망 용암석 전시관에 물을 채워 관람객이 걸을 때 찰박 소리가 나도록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그는 “물에 비친 용암석상의 그림자와 관람객의 걸음소리까지 전시의 일부로 구성할 수 있다”며 이같이 제안했다고 한다. 공원 관계자는 “홍 전 관장이 수시로 방문해 전시와 운영에 관한 아이디어를 냈다”며 “상징탑 등을 세워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용암석을 알리자고도 제안했다”고 말했다.

홍 전 관장은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과 함께 수집한 미술품 중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제주의 자연을 묘사한 이중섭의 작품 12점을 제주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 유족을 대표해 기증하기도 했다.

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