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언론들이 ‘삼성전자가 100억달러 이상을 투자해 미국에 최신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공장을 증설할 것’이라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블룸버그, 월스트리트저널(WSJ) 같은 공신력 있는 매체도 합세했다. ‘170억달러 투자’ ‘2022년 가동’ 같은 구체적인 내용도 포함돼 있다.

삼성전자의 공식 답변은 “투자와 관련해 결정된 게 없다”는 것이다. 부인도 인정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다. TSMC 견제의 필요성, 인텔의 파운드리 주문에 대한 불확실성, 미·중 분쟁 등을 감안해야 하는 삼성전자의 딜레마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美, 반도체 공장에 파격적 지원 추진

24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미국 파운드리 공장 증설을 고민하는 이유로 대만 TSMC의 미국 진출이 꼽힌다. TSMC는 지난해 120억달러(약 13조원)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에 5㎚(나노미터, 1㎚=10억분의 1m) 파운드리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완공 시기는 2024년이다.

파운드리는 생산시설이 없거나 부족한 반도체 기업들의 주문을 받아 제품을 생산·납품하는 사업이다. 주요 고객은 퀄컴 AMD 엔비디아 같은 미국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기업)다. 최근엔 미국의 종합반도체기업(IDM) 인텔까지 파운드리 이용을 확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 본토에 세계 1위 파운드리업체 TSMC의 최신 공장이 들어서면 미국 업체들의 주문이 몰릴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파운드리 공장을 가동 중이다. 1998년 양산을 시작했는데 14㎚ 공정을 주력으로 한다. 범용 제품을 생산하는 데엔 문제가 없지만 최신 반도체 주문을 따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정부의 ‘당근책’도 만만치 않다. 미국 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 일자리 창출 등을 내세워 시스템 반도체, 5세대(5G) 통신 등과 관련한 첨단 공장을 본토로 유치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WSJ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수십억달러의 펀드를 조성해 본토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에 주정부와 별도로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취임 초기인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선물’을 안겨주고 ‘눈도장’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증설을 추진한다면 지금이 최적의 시기라는 것이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몸집 불리기가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의 과감한 액션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과잉투자, 미·중 줄타기 ‘리스크’도 부담

삼성이 감수해야 할 리스크 요인도 많다. 인텔이 삼성전자에 외주 생산을 맡길 물량이 예상보다 적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인텔은 그래픽처리장치(GPU) 외주 물량을 TSMC에 넘겼고 삼성전자엔 ‘사우스브리지’로 불리는 메인보드 칩셋 생산을 맡겼다. 이 물량은 월 1만5000장(웨이퍼 투입량 기준) 정도로 오스틴 공장 생산능력(월 9만 장)의 16% 수준에 그친다. 여기에 인텔은 핵심 제품인 중앙처리장치(CPU)와 관련해선 “대부분 자체 생산할 것”이라고 공언한 상황이다.

삼성이 경기 평택2공장에 들어설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활용한 파운드리 라인에 10조원을 투자하는 등 지난해부터 국내 투자를 본격화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지난해 10월엔 약 30조원이 들어가는 ‘평택3공장’도 착공했다. 자칫 ‘과잉 투자’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삼성전자로선 과거의 뼈아픈 경험도 있다. 2012년 12월 “39억달러(약 4조3000억원)를 들여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을 증설한다”고 발표했는데 당시 주요 고객사였던 애플이 TSMC로 외주 물량을 옮기는 바람에 곤경에 처했던 게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과 중국의 분쟁 역시 심층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안으로 꼽힌다. 중국은 삼성전자 매출의 25.9%(2020년 3분기 별도 재무제표 기준)를 차지하는, 단일 국가 기준 최대 시장이다. 중국엔 시안2공장 낸드플래시 라인 등 삼성전자의 최신 반도체 생산시설도 많다. 중국에서 ‘친미 기업’으로 찍히는 게 부담스러운 상황인 것이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