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호 무대 디자이너가 서울 율현동 작업실에서 뮤지컬 ‘엑스칼리버’의 무대 디자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정승호 무대 디자이너가 서울 율현동 작업실에서 뮤지컬 ‘엑스칼리버’의 무대 디자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작은 직사각형 상자 안에 하나의 세상이 펼쳐졌다. 스티로폼을 오밀조밀 깎아 만든 바위, 종이를 잘게 자르고 이어붙인 나뭇잎….

서울 율현동에 있는 무대 디자이너 정승호 서울예술대 연극과 교수의 작업실은 이런 모형들로 가득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엑스칼리버’의 무대를 형상화한 것들이다. 실제 공연장의 50분의 1 크기인 이 모형 안에는 무대에 올라간 모든 세트와 장치가 정교하게 담겼다. 그가 디자인한 무대를 먼저 모형으로 구현한 것이다. 이후 모형을 제작소에 보내면, 제작소는 그대로 본떠 실제 무대에 올려질 세트를 만든다.

그렇게 정 교수가 무대에 올린 작품은 연극 ‘오이디푸스’ ‘리차드 3세’부터 뮤지컬 ‘엑스칼리버’ ‘레베카’, 오페라 ‘마술피리’ ‘라보엠’, 발레 ‘호이랑’, 이문세 콘서트 등 300여 편에 달한다. 거의 모든 공연예술 장르를 오가며 미니멀한 현대적인 디자인부터 화려하고 풍성한 디자인까지 다양한 무대를 선보여 왔다. 정 교수는 “무대는 또 다른 배우”라고 했다. “좋은 무대는 배경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객에게 말을 걸며 작품이 의도하는 바를 이야기하죠.”

그는 대부분의 무대 디자이너들과 달리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간 뒤 한동안 연극배우로 활동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무대 디자이너 이태섭의 집에 초대를 받고, 그곳에서 작업실을 본 후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정말 멋져 보였어요. ‘나도 저런 디자이너가 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죠. 막연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유리한 점도 많았던 것 같아요. 무대 디자인이라는 게 연극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캐릭터를 중심으로 무대를 생각하고 장면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죠.”

그는 이후 미국 뉴저지주립대 대학원에 진학해 무대미술 석사 과정을 밟으며 무대디자인을 공부했다. 정 교수는 “아직은 관객들이 무대 디자이너가 하는 일에 대해 정확히 모른다”고 했다. 무대 감독, 소품 디자이너가 하는 일과 혼동하기도 한다. “무대 감독은 공연할 때 마이크로 ‘큐’를 외치며 세트와 조명 등 전환을 지시해요. 무대 디자이너는 이것과 별개로 무대를 어떻게 꾸밀지 고민하고 꾸미는 사람이에요. 칼처럼 배우들이 손으로 사용하는 걸 만들면 소품 디자인에 해당하고, 테이블이나 의자같이 부피가 큰 물건을 구상하는 건 전부 무대 디자인에 해당하죠.”

무대를 디자인할 땐 장르별 특성도 최대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레에선 춤출 공간을 넓게 확보하기 위해 구조물 사용을 줄여야 해요. 반면 연극이나 뮤지컬은 구조물을 적극 사용하고 명확한 높낮이를 만들어 많은 움직임을 보여줘야 하죠. 콘서트는 철저히 가수의 색깔에 맞춰 무대를 꾸밉니다.”

정 교수는 “나뭇잎 하나만으로도 무대가 선사하는 감동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대작 ‘엑스칼리버’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도 작은 나뭇잎 하나하나였다. “아더왕이 뛰어다니는 숲을 최대한 울창하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멀리서 보면 마치 3차원(3D) 스크린처럼 입체적으로 깊이 있게 보이길 원했죠. 나무 하나하나 다 조각을 하고 나뭇잎도 최대한 많이 붙여 실감나게 만들었습니다.”

한 해에 15~20편의 작품을 해오던 그는 이제 작품 수를 줄여 매년 장르별로 한두 작품만 올릴 생각이다. 올해에는 국립발레단의 ‘호이랑’ 등을 준비하고 있다. “각 작품에 쓸 수 있는 시간을 늘리려고요. 그러면 더 재미있는 디자인이 많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앞으로 뮤지컬을 비롯한 우리 공연들이 세계로 나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