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41대 대통령을 지낸 ‘아버지 부시(조지 H.W. 부시,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아버지여서 흔히 ‘아버지 부시’로 부른다)’의 사망(11월 30일 밤, 현지시간)을 계기로 미국에서 그의 정치적 유산이 재조명받고 있다.

그는 대통령 재임(1989년 1월~1993년 1월) 중 베를린장벽 붕괴와 소련 연방 해체 등 굵직한 이벤트로 조명을 받았다. 화려한 ‘외치’를 토대로 손쉽게 재선에 성공했을 법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경제 성과가 좋지 않아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에 패하며 연임에 실패했다. 당시 클린턴의 선거 슬로건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에서 ‘바보’가 바로 ‘아버지 부시’를 공격할 때 쓴 말이다. 그와 클린턴은 정적이었다.

하지만 부시 전 대통령은 ‘아름다운 패배’가 뭔지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 주요 언론은 이날 아버지 부시의 사망 소식을 헤드라인으로 올렸는데, 상당수 언론이 1993년 퇴임하는 부시가 새로 백악관에 입성하는 클린턴에게 쓴 편지(사진)를 소개했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친애하는 빌, 지금 이 사무실에 들어설 때 나는 4년전 느낀 것과 똑같은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느낀다. 당신도 똑같이 느낄 것으로 안다. 당신이 여기서 행복하길 빈다” 나는, 일부 대통령이 묘사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다. 매우 어려운 시간도 있을거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비판 때문에 그 순간이 훨씬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내가 조언을 하기에 매우 좋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비판자들이 당신을 의기소침하게 만들거나 (정해진)코스에서 이탈하게 만들지 말라. 이 메모를 읽는 순간 당신은 우리 대통령일 거다. 당신과 가족들이 잘 지내길 빈다. 당신의 성공이 우리 나라의 성공이다. 나는 열렬히 당신을 응원한다. 행운을 빈다- 조지.

(Dear Bill, When I walked into this office just now I felt the same sense of wonder and respect that I felt four years ago. I know you will feel that, too.
I wish you great happiness here. I never felt the loneliness some Presidents have described.

There will be very tough times, made even more difficult by criticism you may not think is fair. I'm not a very good one to give advice; but just don't let the critics discourage you or push you off course.
You will be our President when you read this note. I wish you well. I wish your family well.
Your success now is our country's success. I am rooting hard for you.
Good luck—
George)

아버지 부시는 생전에 “서로 경쟁했다고해서 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치가 정중하지 못하고 끔찍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Because you run against each other, that doesn't mean you're enemies, Politics doesn't have to be uncivil and nasty.” ). 실제로 아버지 부시는 클린턴과 돈독한 관계를 이어갔다. 아들 부시(43대 대통령)을 포함해 부시 가문과 클린턴 가문의 관계도 좋았다.

올해 4월 아버지 부시의 부인이자, 아들 부시의 어머니였던 바바라 부시 장례식 때 클린턴 대통령 부부, 오바마 대통령 부부가 나란히 찍은 사진이 미국인들을 뭉클하게 했다. (아버지 부시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트럼프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고,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만 참석했다.) 미국 권력의 정점에 백인과 흑인, 혼혈(오바마)과 이민자(멜라니아), 문화가 전혀 다른 북부 출신과 남부 출신, 정치 명문가와 서민 출신이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이야말로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란 평가도 나왔다.

아버지 부시의 장례식은 12월5일 열린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을 아버지 부시를 위한 애도의 날로 정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날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그의 우정은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선물 중 하나”라며 “상대방이 적이 아니고, 다른 의견과 생각을 바꾸는데 열려있는” 정치를 아버지 부시가 남긴 유산으로 꼽았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