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세기의 합병’을 완료하고 출범한 거대 화학회사 다우듀폰이 행동주의 헤지펀드에 또다시 굴복했다. 당초 발표한 분사 계획을 헤지펀드 제안대로 재조정했다. 미국 1, 2위 화학회사이던 다우와 듀폰이 2015년 합병을 발표한 것도 행동주의 헤지펀드 공격 때문이었다. 행동주의 펀드의 기세가 높아지면서 수백 년 역사를 가진 거대 기업들도 쩔쩔매고 있다.
다우듀폰 합병부터 사업분할까지… '행동주의 펀드 뜻대로'
펀드 요구대로 사업 재조정

다우듀폰은 지난 4일 합병 절차를 끝내고 한 회사로 출발했다. 2년 전 합병 발표대로 내년 중 △농업회사(종자·비료 등) △소재회사(일반화학제품) △특수화학제품회사(전기전자소재 등) 등 3개 회사로 분사할 계획이었다.

다우듀폰은 이런 분사 계획을 재조정했다고 12일(현지시간) 밝혔다. 소재회사에 속할 예정이던 수처리, 폴리머, 실리콘 등 8개 사업을 특수화학제품회사로 넘기기로 한 것이다. 이들 사업의 연매출은 80억달러(약 9조200억원)에 달한다.

몇 년째 경영에 간섭해온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트라이언파트너스, 서드포인트 등이 요구해 온 재편안이다. 펀드들은 소재회사가 너무 많은 사업을 관할하면 전문화가 어렵다며 축소를 주장해 왔다. 서드포인트는 아예 회사를 3개가 아니라 6개로 나누라고 했다. 앤드루 리버리스 다우듀폰 회장은 “좀 더 전문화된 소재회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우듀폰은 몇 달 안에 자사주 매입 및 배당 확대 계획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월가의 유명 투자자 넬슨 펠츠가 이끄는 트라이언은 “다우듀폰의 사업 조정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헤지펀드계 거물인 대니얼 롭의 서드포인트는 “모든 투자자 이익을 위한 긍정적 결과물이 나와 기쁘다”고 말했다.

거대 기업도 쥐락펴락해

다우케미칼과 듀폰은 미국 화학업계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 같은 회사였다. 듀폰은 1802년, 다우케미칼은 1897년 창립했다. 역사가 100년이 훌쩍 넘는 대기업이 2015년 갑자기 합병하고 다시 회사를 3개로 쪼개겠다고 발표하자 미국 산업계는 깜짝 놀랐다.

다우케미칼은 2014년 서드포인트의 공격을 받았다. 서드포인트는 그해 1월 다우 지분 2.3%를 매집한 뒤 저부가가치 사업을 분사하고 자사주 매입을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다우는 11월 서드포인트가 원하는 이사 2명을 받아들이고 ‘휴전’했다.

듀폰은 2013년 트라이언 공격을 받았다. 회사를 3개로 분사해 10억달러의 비용을 줄이고, 50억달러 규모 자사주를 사들이라고 요구했다. 당시 듀폰 최고경영자(CEO)인 엘런 쿨먼은 이를 거부했다. 쿨먼은 2015년 5월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 끝에 트라이언에 이겼다.

상처뿐인 승리였다. 트라이언 편에 선 기관투자가들의 입김으로 결국 표결 5개월 만인 10월 물러나야 했다. 후임 CEO는 트라이언이 추천한 에드워드 브린(현재 다우듀폰 CEO)이 맡았다. 직전 경영하던 타이코를 3개 회사로 분할한 브린은 즉각 주가 높이기에 돌입했다. 그 결과가 2015년 12월 전격 발표된 다우와 듀폰의 합병이다. 두 헤지펀드가 막후에서 주도한 셈이다.

주주가치 vs 장기 경쟁력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특정 기업 지분을 매입한 뒤 경영 참여를 요구해 주식 가치를 끌어올린다. 소송이나 주총 표 대결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자본력이 취약한 기업을 목표로 했다.

최근엔 돈이 몰려들자 글로벌 대기업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다우듀폰의 합병이 이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유기농 식료품 유통체인 홀푸드가 지난 6월 아마존에 팔린 것도 행동주의 펀드 자나파트너스가 홀푸드 경영진에 주가 상승 방법을 찾으라고 계속 압력을 넣으면서 비롯됐다.

행동주의 펀드가 마음에 안 드는 기업 경영진을 갈아치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올 들어 헤지펀드 요구로 제프리 이멜트 제너럴일렉트릭(GE) CEO를 포함해 포드자동차, US스틸, CSX, AIG, 야후, 에이본 등 10여 개 기업 CEO가 교체됐다. P&G, 네슬레, BHP빌리턴 등 글로벌 기업 여러 곳이 헤지펀드와 ‘전쟁’ 중이다. 이 중 P&G를 공격하고 있는 곳 역시 트라이언이다.

행동주의 펀드 영향력이 커지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들이 주주가치를 높인다는 찬성론이 있지만, 단기 차익을 위해 기업의 장기 경쟁력을 저해한다는 반대 목소리도 많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