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13일(현지시간) 친(親)러시아 인사인 렉스 틸러슨 엑손모빌 최고경영자(CEO)를 국무장관으로 지명하자 유럽이 강력한 경계에 들어갔다.

미국이 러시아와는 가까워지고 전통의 우방인 서유럽 핵심국가들과는 멀어지는 트럼프판 신국제질서가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바탕에 깔렸다.

영국의 유력 일간 가디언은 14일 "틸러슨의 낙점이 러시아에는 흥분을, 동유럽 국가들에는 전율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분위기를 요약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17년 인연을 가진 틸러슨의 발탁이 대서양 동맹으로도 불리는 미·유럽의 우호관계를 뒤집지 않을까 걱정한다고도 전했다.

국제 이슈를 많이 다루는 독일의 보수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은 14일 사설에서 틸러슨 발탁은 트럼프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진정으로 개선하겠다는 신호일 수 있다고 했다.

"중국에 맞서 러시아와 함께하는 미국, 그리고 그 중간 어디쯤 있는 유럽"이라는 새로운 판이 짜일지 모른다는 관점도 내비쳤다.

FAZ는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그걸 알 수 없다"면서 "트럼프만큼이나 지정학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비평했다.

다른 일간지 벨트는 "유럽연합(EU)은 트럼프가 유럽의 이익을 해치며 러시아에 우호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다"면서 "무엇보다 푸틴이 (과거 구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동유럽을 러시아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트럼프의 영향력을 EU는 차단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다만, 인준 청문회를 앞두고 있을뿐 아니라 막상 청문회를 거쳐 집무를 시작하면 정책과 관점의 '클릭 조정'이 이뤄지는 것이 통례라는 점에서 유럽 외교가에는 신중한 관망의 분위기도 퍼져있다.

한 고위 외교관은 가디언에 "미국 국무장관직은 다른 우선순위들이 있는, (기업 CEO와는) 다른 직"이라며 "그가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어떤 접근을 할지는 인준 청문회에서 내놓을 핵심 이슈들에 대한 답변을 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유럽 우방들은 이 과정에서 러시아와의 관계 설정,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관해 틸러슨이 밝힐 견해에 주목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다른 동유럽 국가들은 트럼프와 틸러슨이 러시아와 대러 제재를 종식하는 "빅딜"을 하는 가능성을 가장 우려하는 만큼 이에 관한 틸러슨의 정견과 트럼프 당선인의 향후 정책 조율이 주요 관심사로 떠오를 수 있다.

유럽 외교가에선 일단,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민스크 협정' 이행이 온전하지 않는 정세에서 미국이 유럽 우방들의 뜻을 거슬러가며 그런 딜을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우세한 편이다.

EU에서 가장 발언권이 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전날 베를린을 찾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내년 1월말로 끝나는 대러 제재의 연장 필요성까지 언급하고 나선 상황이다.

EU를 떠나는 영국을 제외한다면, 독일과 프랑스의 리더십이 EU의 중심 기류를 잡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15일 브뤼셀에서 열리는 EU 정상회의 논의 결과에 관심을 쏠린다.

지난 2012∼2014년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마이클 맥폴도 트위터에 "미국과 동맹들이 푸틴의 우크라이나 개입을 이유로 러시아를 제재했다"면서 "틸러슨이 러시아의 정책 변화가 없는데도 제재를 걷어낼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가디언은 또한, 유럽 동맹국들은 틸러슨이 나토의 핵심을 대테러세력으로 보는지, 아니면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유럽의 (집단)안보장치로 여기는지에도 시선을 집중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앞서 선거 과정에서 나토 회원국이더라도 분담금을 적게 내는 등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미국이 그 회원국을 위해 공동방위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나토 집단안보체제에 불안을 안기는 모습을 보였다.

때마침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일간 벨트에 공동기고한 글에서 EU와 나토 간 미래 공조를 강조하며 "더욱 긴밀한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다"고 합창했다.

(베를린·런던연합뉴스) 고형규 황정우 특파원 uni@yna.co.kr, jungw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