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배제의 정치로 '트럼프 현상' 만들어…실제 정책수행 과정에 '촉각'

'이단아'가 마침내 미국 정치를 뿌리부터 뒤집었다.

8일(이하 현지시간) 대통령선거에서 일반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승리한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그 주인공이다.

'트럼프 현상'이 단순한 대중의 변덕 때문이 아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인 만큼 트럼프의 승리는 대선 당일의 충격파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미국 정치권에 꾸준한 여진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패장'이 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은 물론이고 여당이 된 공화당에서도 기존 정치 스타일을 고수하던 사람들은 앞으로 대통령 트럼프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 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질 전망이다.

◇ '문제아'에서 대선후보까지 = 1946년 독일계 이민자 2세의 차남으로 태어난 트럼프는 유년기부터 자존심이 강하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만 지나친 승부욕이 학교에서의 일탈 행위로 계속 표출되자, 트럼프의 부친 버지 드레드 트럼프는 '문제아' 아들을 일반 고등학교 대신 '뉴욕 군사학교'로 보냈다.

뉴욕군사학교 졸업 후에는 뉴욕의 포덤대학을 거쳐 미국 명문대학 중 한 곳인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인 와튼스쿨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직후 아버지와 함께 부동산 사업에 손을 대면서 돈을 벌었고 1971년 아버지에게서 '엘리자베스 트럼프 & 선'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사명을 지금의 트럼프그룹(The Trump Organization)으로 바꿨다.

현재 자신의 이름 '트럼프'를 내건 호텔과 골프장, 카지노 등을 운영하고 있다.

경제전문지 포브스 추산 기준으로 37억 달러(약 4조2천억 원)의 재산을 가진 트럼프지만, 뉴저지 주 애틀랜틱 시티에 타지마할 카지노를 세웠다가 도산하는 등 1991년부터 2009년까지 4차례의 도산을 겪기도 했다.

사업에 전념할 때의 트럼프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기보다 편의에 따라 지지 정당을 바꾸는 모습을 보였다.

공화당(1987∼1999년) 당적을 가졌다가 개혁당(1999∼2001년), 민주당(2001∼2009년)을 거쳐 2009년 공화당으로 돌아왔으나 이후 탈당했고, 2012년에 다시 공화당에 입당했다.

트럼프는 2000년 개혁당 경선에 출마했으나 중도에 포기했다.

이후 2004년, 2008년, 2012년 대선 때도 대선 후보 참여를 저울질했으나,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해 6월 16일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공식으로 선언했다.

출마 선언 당시에는 한 자릿수 초반대의 미미한 지지율과 TV쇼 출연자로 유명해졌다는 점 때문에 정치가 아닌 유명세를 좇아 '튀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트럼프는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의 아들 젭 부시를 비롯한 16명의 쟁쟁한 경쟁자를 차례로 꺾고 끝내 대권후보 자리를 거머쥐었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는 날까지 클린턴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 소외 계층을 겨냥한 막말과 배제의 정치 = 미국 언론과 정치분석가들은 트럼프의 정치를 '막말'과 '배제'라는 두 가지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기조는 트럼프의 공고한 지지층인 농촌 지역의 저소득·저학력 백인들을 끌어모으는 수단이고, 트럼프의 전용기와 그의 TV쇼 '어프렌티스'에서 했던 유명한 대사 '넌 해고야'라는 말은 지지층의 결속을 다지는 수단이었다.

기성 정치인들이 어떤 정책을 펴는지와 무관하게 그동안 경제적으로 불황을 벗어나지 못했던 트럼프 지지자들은 잇따라 나오는 기성 정치인들의 부패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소외됐다는 인식과 함께 정치인들에 대한 증오를 키워 왔고, 그런 사람들은 트럼프가 하는 '막말'들을 기성 정치권의 '정치적 결벽증'을 부수는 '카타르시스' 혹은 대리 만족의 수단으로 삼았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거나 '이슬람교도 입국을 막겠다'는 말로 대표되는 트럼프의 '배제의 수사학' 역시 트럼프 지지층 입장에서는 부당하다는 가치판단으로 이어지기보다 그동안 소외됐던 자신들에 대한 관심이라고 받아들였다.

트럼프는 이런 자신의 주장을 '미국 제일주의'라고 포장했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호황기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의 '강하게 보였던' 시기를 그리워하던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그런 트럼프의 주장은 마른 모래에 물이 스며들듯 고스란히 자리잡았다.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을 거치는 동안 워싱턴포스트 같은 미국의 주류 언론에서도 그가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의 비호감까지도 마다치 않는 사람으로만 치부하는 시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주별 공화당 경선에서 파죽지세의 승리 행진을 이어가자 주류 언론과 정치 분석가들은 트럼프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지지를 '트럼프 현상'이나 '트럼피즘' 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령화나 인종별 인구구조의 변화부터 금융위기의 여파나 제조업의 몰락 같은 다양한 배경들로부터 트럼프 출현의 원인을 도출하기 위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트럼프를 긍정적으로 여겼든 사람이든 부정적으로 봤든 이들이든, 트럼프가 미국 정치에 깊은 흔적을 남길 것이고 그 흔적이 미국 정치에 지각 변동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상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정치 분석가들은 대권 도전자가 아닌 당선인으로서 트럼프가 실제로 어떤 인선을 할지, 그리고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입을 모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실제로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의회와의 조율이 필수적인 만큼 선거운동 과정에서 주장했던 과격한 정책들을 실현하려 고집하기보다 '타협'의 길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냈다.

'블랙 스완'이라는 말로 2008년 금융위기를 예측했던 나심 탈레브 뉴욕대 교수는 지난 3일 CNBC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그는 분명히 발언 수위를 낮출 것"이고 "아마도 종말론적으로 보이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워싱턴연합뉴스) 김세진 특파원 smil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