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두 개의 언어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의 주인공은 시를 좋아한다. 시인이 되고 싶은 그는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칭한다. 시민들은 승마나 말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는 하늘이나 별, 바람에 관심이 많다. 친한 사람과의 대화에서 차이점만 느끼니 그는 외로워진다. 그리고 시인은 시민과 다르다는 결론에 닿는다.

시민과 시인이라는 이 두 카테고리는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 보았을 법한 문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시민이자 시인이 돼야 한다. 두려운 건 시인으로서의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다. 시민의 언어는 시인의 언어보다 힘이 세고 훨씬 더 현실적이다. 주로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시민의 것이기에 시인의 감각은 애써 훈련하지 않는 이상 쉽사리 증발되고 만다.

글을 쓰고 산다는 것은 두 개의 언어를 쓰고 사는 것과 유사하다. 이민을 가거나 온 사람에게 모국어와 제2외국어가 있듯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시민으로서의 언어와 시인으로서의 언어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외국에 살면서 모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듯 그렇게 언어를 지키려 노력해야 글 쓰는 언어도 간직된다.

두 개의 언어를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계절의 변화나 세상사 일들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시각과 그 시각을 표현할 정확한 단어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태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글을 쓴다는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때로 지면이 아니고서는 나누기 힘든 대화들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유행어나 추상적 느낌으로 채워진 대화는 전달은 되지만 부정확할 때가 많다. 그런 일상 속에서는 진실을 나누기 어렵다. 사유라고 부르기 적합한 생각들은 일상에서 조금 빠져나올 때 드러나곤 한다. 적어도 글을 읽는 독자들은 소리가 아닌 내면적 대화의 상대가 돼 준다. 소리 나지 않는 이 조용한 대화야말로 갈증을 채워 준다.

먹고 살기 위해 반드시 써야만 하는 어휘가 외국어라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모국어는 문어체가 아니고서는 전달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확한 문장이 정신의 창문이 돼 준다. 글을 쓰는 것, 그것은 밀폐 공간의 환기구와도 같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