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이노베이션의 첨병, 혁신 중재자
1989년 미국 알래스카 인근에서 엑슨모빌 소속 유조선 발데즈호가 좌초됐다. 이때 상당한 양의 기름이 유출되면서 많은 해양 생물이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사진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전문가들이 유출된 기름 수거에 나섰지만 바닷속에 젤리처럼 굳어진 기름은 제대로 건져내지 못했다. 2007년 이노센티브라는 회사가 해결에 나섰다. 3개월 뒤 시멘트 회사의 한 엔지니어가 시멘트 사용 기술을 응용하자고 제안했고 기름을 쉽게 녹일 수 있었다.

획기적인 기술과 아이디어일수록 전혀 다른 분야에서 나오곤 한다. 하지만 외부에서 해결 방안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방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거나 많은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상시적인 조직을 운영하려면 부담이 따른다.

이 가운데 기술·아이디어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해주는 ‘중재자’ 또는 ‘인터미디어리(intermediary)’들이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기술 거래를 성사시킬 뿐만 아니라 거래와 관련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술을 사업화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맡기도 한다.

중재자가 필요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기술 공급자들은 기술 유출 우려 때문에 모든 아이디어를 공개하기 어렵다. 따라서 수요자들은 한정된 기술 정보만을 가지고 활용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기술 거래가 활성화되기 어렵다. 이때 중재자가 있다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술 거래를 중개할 수 있다.

둘째, 기술 수요자들은 기술을 요구할 때 해당 분야의 전문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타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객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다시 정리하고 필요한 기술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 중재자가 분야 간 소통의 벽을 허물면 해결 방안을 훨씬 쉽게 만들 수 있다.

셋째, 기업이 다양한 분야에서 해결 방안들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을 적절한 기준으로 걸러내기는 어렵다. 결과물을 보다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걸러내고 해석해야 하는데 이때 중재자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중재자는 네트워크 유형에 따라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클라우드 소싱형(고객 기업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전체적으로 공유하면 세계의 ‘솔버(solver)’들이 해결 방안을 제시) ②전문 분야 네트워크 보유형(중재자가 개별적으로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으며 해당하는 분야의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 ③유사 성격 그룹에 대한 게이트 키퍼(gate keeper)형(유사한 성격의 기업이나 단체들이 모여 있는 그룹에서 기술 교류의 창구 역할) ④특허 기술 거래 마켓플레이스형(특허를 보유한 기업과 이를 필요로 하는 기업을 연결시켜 주고 거래를 성사) 등이다.

필립스, 인텔, 지멘스, 도요타 등 많은 기업이 중재자들을 활용하고 있다. 충분한 검토 없이 중재자를 선택한다면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얻기 어렵다. 중재자를 찾은 이후에는 문제 해결을 위해 동반자의 자세로 적극적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

문제만 던져놓고 중재자들이 가지고 오는 해결 방안만 검토하겠다는 소극적인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결과물이 원하는 수준이 아니더라도 덮어 두기보다는 이를 바탕으로 최선의 해결 방안을 찾도록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한다.

유기돈 <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kidon@lgeri.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