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에 있는 ‘장조지’ 레스토랑 주방에서 마르자 봉게리히텐과 그의 남편 장조지가 미역 등의 식재료로 한식을 만들고 있다. 유창재 특파원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장조지’ 레스토랑 주방에서 마르자 봉게리히텐과 그의 남편 장조지가 미역 등의 식재료로 한식을 만들고 있다. 유창재 특파원
엄마는 총각김치를 물에 씻어 젓가락에 꽂아 건넸다. 17년 전 세 살 때 해줬던 것처럼 손에 쥐고 편하게 먹으라는 배려였다. 식탁엔 불고기, 잡채, 미역국 등 온갖 한국 음식이 가득했다.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17년 동안 완전히 잊고 있던 미각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반(半)한국인’ 마르자의 ‘한식 중독’이 시작됐다.

마르자 봉게리히텐(38). 뉴욕 최고 프랑스 레스토랑인 ‘장조지’의 오너 셰프 장조지 봉게리히텐의 아내다. 몇 년 전 남편과 함께 한국을 여행하며 한식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김치 연대기’를 찍은 한식 전도사이기도 하다. 김치 연대기는 미국 공영방송 PBS에 방송된 뒤 전 세계로 퍼졌다. 이 프로그램을 본 한 중국 거부의 제안으로 지난달 상하이에 ‘Chi-Q(김치와 바비큐의 합성어)’라는 이름의 고급 한식당도 열었다.

한식으로 다시 만난 어머니의 나라

[人사이드 人터뷰] 한국은 날 버렸지만, 한식은 내 미각을 되살렸다
마르자가 한식과 재회한 건 만 20세 생일을 3개월 남긴 1995년의 어느 날이었다. 뉴욕 공항에는 아시아인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버지니아에서 날아온 마르자는 인파 속에서도 17년 만에 만나는 친어머니를 단번에 알아봤다. 동물적 끌림이었다. 어머니는 브루클린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딸을 데려가 어린 시절 마르자가 좋아했다는 음식들을 모조리 해줬다.

“17년간 좁아졌던 제 입맛이 확장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때부터 한국 음식은 나와 한국을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됐죠. 내가 한국을 다시 배울 수 있도록 해준 교과서가 바로 한식입니다.”

한국은 어머니의 나라지만 그를 버린 나라다. 마르자는 주한미군이던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어머니가 마르자를 임신한 지 7개월 만에 사라졌다. 그 이후론 소식이 끊겼다. 마르자는 세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됐다. 역시 한국에서 근무했던 해병대 소령 출신인 양아버지가 그를 입양했다. 양어머니는 변호사였다. 마르자는 북부 버지니아의 한 마을에서 평범한 미국 중산층 소녀로 자랐다.

“입양되기 전 한국에 대한 기억은 짧은 순간의 장면들만 남아 있어요. 엄마가 큰 양동이에 담긴 담요를 발로 밟아가며 빨던 모습, 고향인 의정부의 골목길들, 내가 좋아했던 바나나 우유. 그런 것들이요.”

다시 찾은 가족, 한식 선생님이 되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대학에 가기 전까지 어머니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성껏 자신을 키워주고 있는 양부모를 배신하는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대학에 가고 양부모에게서 독립하면서 마르자는 어머니를 찾기로 결심했다. 양아버지는 1979년 마르자를 입양한 뒤 3개월이 지나 의정부를 방문했었다.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마르자의 친어머니를 찾았다. 나중에 딸이 궁금해할까봐 친어머니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다. 그 기록은 17년 후 마르자가 어머니를 찾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소개해준 한국 수녀님들을 통해 3개월 만에 엄마 전화번호를 받았어요. 미국인과 결혼해 뉴욕 브루클린에 살고 계셨죠. 수화기를 들고 몇 시간을 고민하다 용기를 내 전화를 했어요. 엄마는 너무 놀라 흐느끼기만 하셨죠. 나중에 들으니 저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이는 더 낳지 않으셨다고 하더군요.”

17년 만의 재회로 마르자는 어머니와 세 명의 이모, 삼촌 등 새 가족이 생겼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건너와 그때부터 가족과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와 이모들은 마르자의 한식 선생님이 됐다. 요리를 좋아하는 양아버지의 영향으로 12세 때부터 요리를 해온 마르자는 빠르게 한식을 익혔다.

“한국의 엄마들은 눈대중으로 요리를 하잖아요.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제 나름대로 여러 차례 시도해보다가 저만의 요리법을 만들었어요. 김치 연대기 방송 후 쓴 요리책도 그렇게 개발한 레시피들을 모은 것이죠. 지금은 가족들 모두 제가 한식을 더 잘 만든다는 데 동의해요.(웃음)”

나를 버린 건 엄마가 아닌 한국 사회

마르자는 자신을 입양 보낸 엄마에게 화가 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전혀 아니었다”고 답했다. “양아버지의 역할이 컸어요. 만약 한국에 남았다면 내 인생이 어땠을지 잘 이해시켜 주셨죠. 엄마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요.”

당시 한국에서 마르자와 같은 혼혈아들은 출생신고조차 할 수 없었다. 서류가 없다 보니 학교도 가지 못했고 거리에 버려지기 일쑤였다. 그는 “그런 아이들은 결국 몸을 팔거나 미군 부대에서 가수가 되는 것 말고는 선택권이 없었다”며 “혼혈아를 키우는 미혼모도 직장 구하기가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엄마가 아니라 당시 한국의 문화에 화가 났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 문화 말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미혼모는 여전히 한국에서 살아가기 힘들어요. 한국은 아직도 세계 최대 입양아 수출국이죠. 다른 핏줄을 입양하는 것에는 무관심하고요. 단일민족이요? 무엇을 위한 단일민족인가요?”

인터뷰 내내 밝은 표정을 짓던 마르자도 이 대목에서는 사뭇 심각해졌다. 그는 한국 고아원에 있는 다섯 명의 고아를 후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중 세 명은 부모가 멀쩡히 살아 있는 이혼 부부의 자녀다. 무책임한 한국 부모들과 사회 시스템에 마르자는 단단히 화가 나 있는 듯했다.

럭셔리 아파트 욕조에서 김치 담그기

마르자와 장조지는 장조지가 운영하는 뉴욕의 여러 식당 중 하나인 ‘페리스트리트’ 건물 위층에 산다.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최신식 아파트다. 마르자는 이 럭셔리 아파트의 욕조를 활용해 정기적으로 김치를 담근다. 뉴욕 아파트에는 따로 김치를 담글 만한 공간이 없어서다.

마르자는 어린 시절 여배우를 꿈꿨다. 작은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고 ‘미스 USA 틴에이저 미인대회’에도 나갔다. 뉴욕에 온 그는 배우 오디션을 위해 근무시간이 유연한 직장을 찾았고 한 식당에 취직했다. 장조지 레스토랑이었다. 뉴욕을 대표하는 스타 셰프 장조지는 마르자에게 한눈에 반했다. 스무 살 연상인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마르자도 서서히 장조지에게 빠져들었다. 두 사람은 커플이 됐고 세계 각지를 함께 다녔다. 22세의 마르자에게는 ‘신세계’였다. 24세가 되던 2000년 딸 클로이를 낳았고 2004년에는 결혼에 골인했다.

장조지는 태국에서 셰프 커리어를 시작한 프랑스 요리사다. 자연히 아시아 음식에 익숙하다. 하지만 마르자와 결혼하기 전까지 한식은 잘 알지 못했다. 마르자가 냉장고에 넣어둔 김치 냄새를 시체 썩는 냄새로 착각했을 정도다. 지금은 주말마다 마르자가 만들어준 닭볶음탕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많이 배워요. 예를 들어 장조지는 저에게 제철 재료에 대해 가르쳐주죠. 겨울에는 제철이 아닌 토마토는 쓰면 안 된다는 식이에요.”

장조지는 마르자로부터 한식을 배운다. 예를 들어 마르자가 처음 빈대떡을 만들었을 때 그는 “분명히 우유와 밀가루를 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자는 녹두와 물, 찹쌀만 써서 빈대떡을 만드는 장면을 직접 시연했다. 이후 장조지는 한국 음식이 건강한 음식이라고 홍보할 때마다 빈대떡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곧 한식의 세계화인 셈이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