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모를 불황의 터널에서도 남다른 노력과 혁신,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우뚝 선 성공기업들의 숨은 이야기로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한경닷컴 산업경제팀 기자들이 취재현장에서 발굴한 기업들의 생생한 성공스토리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도전과 위로가 되어 드릴 것입니다. <편집자 주>
신은주 하이트진로 마케팅실장 상무이사
신은주 하이트진로 마케팅실장 상무이사
긴 연휴 덕분에 한 명도 빠짐없이 모인 20~30대 동향(同鄕) 친구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고깃집을 찾았다. 민소매 패션의 낯선 추석 풍경 만큼이나 고깃집에서도 보기 드문 주문이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디(d) 없어요?"라고 묻는다. '카스 아니면 하이트'로 통하던 국민 맥주 공식에 또렷이 금이 가는 소리다.

하이트진로그룹이 차세대 맥주로 장착한 '드라이피니시 d(DryFinish d)'는 당분을 깨끗하게 발효시켜 잔 맛이 남지않도록 잡미(雜味)를 없앤 맥주다. 이 맛을 내기 위해 하이트진로는 5년 간 49번째 시도 끝에 드라이 효모(Dry Yeast)를 찾아냈다.

'd'는 오랜 불황의 위기 속에서 탄생한 하이트진로의 '다크호스'다. 20~30대 특정 연령층, 서울·경기지역 소비자만 노리고 벌인 초기 마케팅 전략도 주효했다. 그래서 '가장 젊은 맥주'로 불린다. d의 올 상반기 판매성장율은 지난해와 비교해 85.7%, 브랜드 인지도의 바로미터인 유흥중병(족발집 고깃집 등 음식점)의 경우 130% 가까이 뛰었다.

d라는 '신인 가수'를 데뷔시켜 국내 맥주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는 신은주 마케팅실장(41·상무이사·사진)을 강남구 청담동 하이트빌딩에서 만났다. 그는 오리콤, 동방커뮤니케이션즈를 거쳐 SK텔레콤 기업PR 업무 등을 맡으며 차곡차곡 경력을 쌓은 뒤 2009년 12월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 '원샷 문화' 착안 맞춤형으로 나온 d…연구기간 5년·소비자조사 2년·개발시도 49번

d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차가운 맥주를 단 번에 들이키는 이른바 '원샷 문화'에서 착안된 맥주다. 당분 또는 탄산 등의 도움 없이 맥주 자체의 효모로만 시원한 느낌을 주는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경쟁력을 키운 것이다.

"d가 첫 판매를 시작한 2010년 8월 당시에만 해도 10종 가량의 다양한 맥주가 연구소에서 개발되고 있었어요. 그 중에서도 d가 한국인의 입맛에 어울린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 짠 음식이 많고 고기 소비량이 많은 식습관 탓에 갈수록 단맛이 적고 끝맛이 깔끔한 맥주 소비량이 늘고 있어요."

가장 먼저 국내 소비자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든 '맞춤형 맥주'가 d란 얘기다. d는 2005년 글로벌 맥주연구소인 덴마크 댄브루(DANBREW ALECTIA)의 기술 제휴와 5년 간 50여차례 개발 실패 끝에 잔을 채울 수 있었다.

"까다로운 한국의 입맛부터 적응해야 해외에서도 통한다고 봅니다. d에는 드라이 타입의 맥주를 위해 직접 개발한 공법인 '드라이피니시(DryFinish)'가 적용됐어요. 이 공법은 발효과정에서 드라이 효모를 통해 맥즙 안에 당분을 깨끗이 발효시켜 마지막 목 넘김의 순간에 맥주의 잔 맛이 남지 않도록 잡미를 제거해주는 핵심 발효기술이죠. 49차례의 시도 끝에 이것이 가능한 드라이 효모를 찾아냈어요."

그간 다뤄보지 않은 효모라서 안정성도 여러 번 철저히 점검해야만 했다. 이 탓에 댄브루사는 3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도 하이트진로를 '까다로운 고객'의 대명사로 부르고 있다는 후문이다. 심지어 이곳 내부 회의에선 질책성 발언으로 '하이트진로와 같다'는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는 게 신 상무의 웃음 섞인 농담이다.

◆ 77년 만에 뜯어고친 병 디자인…'늙어 보이는' 생(生)맥주 d 안팔아

[Biz스토리 (20)]'49전 50기' 가장 젊은 맥주 '드라이피니시 d' 성공스토리…"'카스 아니면 하이트' 공식 깼죠"
d는 여느 맥주와 전혀 다른 효모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특별한 용기에 술을 담았다. 국내 맥주 역사 77년 만에 병 디자인도 한 단계 진화한 것이다. 하이트진로는 d의 시장 안착을 위해 상당한 투자비용도 마다하지 않았다.

"d의 병을 디자인할 때 가장 중점을 둔 것이 '팝업성'이에요. 다른 맥주 병들과 함께 놓여있을 때 눈에 확 띄게 만들고 싶었죠. 그래서 병 둘레를 기존 병 맥주보다 날씬하게 해 한 손에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했어요. 나아가 전반적으로 윗부분이 너무 길어 불안정했던 국내 맥주병의 단점을 보완해 균형도 다시 잡았습니다."

드라이피니시 d 병의 색깔은 다른 병맥주보다 더 진한 암갈색이다. 여기엔 유통과정에서부터 자외선을 철저히 차단해 품질의 안정성을 높이겠다는 고도의 전략이 숨어있다. 기존의 사각형 라벨도 타원형으로 바뀌었다.

특이한 점은 또 있다. d가 시장에 나온 지 3년 가까이 지나고 있지만 '생(生)맥주 d'는 어느 곳에서도 구경할 수 없다. 하이트진로는 당분간 '더 젊은 마케팅'을 벌이기 위해 자칫 '늙어 보인다'는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생맥주를 내놓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20~30대 젊은 소비자들은 '아웃도어 라이프스타일'이 많아요. 이들 세대는 저녁을 먹으면서 맥주를 곁들여 마시고 2, 3차로 자리를 옮겨 또 다시 생맥주를 마시는 일은 거의 없죠.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주로 생맥주를 즐기는 문화인 셈이죠. 요즘 트렌드에 맞춰 용기를 구성하려고 해요. 생맥주 대신 330ml, 500ml, 국내 유일의 5L 점보캔 등 다양한 용기를 내놓고 있죠."

하이트진로는 d의 브랜드 알리기보다 맛부터 어필하기 위해 출시 초기엔 특정 광고 모델을 쓰지 않았다. 대신 전국 대학교 대동제(대학축제)를 빼놓지 않고 방문해 d를 지원했고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락페스티벌에도 늘 찾아갔다. 젊은 세대가 d를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게 만들려는 하이트진로의 계획된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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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맥주 없이 역대 최단기간 月판매량 '1등'…"마트·편의점에서 d를 고른다"

d는 세상에 나온 지 34개월 만에 카스와 하이트로 양분된 국내 맥주 시장을 흔들었다. 지난 6월 d의 월간 판매량이 100만C/S(1C/S: 500ml X 20본)를 돌파했고 이는 생맥주를 판매하지 않는 국내 맥주 브랜드로는 역대 가장 짧은 돌파 기록으로 남았다.

"새로 나온 맥주가 2~3년 만에 급속도로 판매고를 높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에요. 지난 6월까지 팔려나간 d의 경우 주용기인 330ml병 판매량으로 계산하면 무려 3030만병에 달하는 양입니다. 330ml병 길이로 환산하면 6969Km로 서울과 부산을 9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에 해당합니다."

아울러 d는 20대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4년 연속 맥주 브랜드 모멘텀(Momentum) 1위(엠브레인, Brand Index 조사 기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올 상반기 d의 판매율은 지난해 같은 시기와 비교해 86% 가까이 성장했고 음식점 판매율은 130%에 육박하는 급성장세다.

고무적인 분위기는 3~4개월 전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사실상 소비자들의 선택권이 좁은 유흥업소가 아니라 가정 채널이 직접 골라 마시는 대형마트와 편의점 등에서 d의 시장점유율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어서다.

"지난 4월말 이후로 일부 대형마트에서 d의 시장점유율이 10%를 뛰어넘었어요. 매달 판매되는 전체 병맥주 가운데 10병 중 1병 꼴로 d를 장바구니에 담고 있다는 얘기죠. 내부적으로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에요. 자체 집계이긴 하지만 다른 경쟁업체 맥주 또는 하이트에서 d로 바꾸는 '스위칭 비율'도 압도적인 수준입니다. 마치 신인 가수가 데뷔 첫해 음원 다운로드 순위 '넘버 10'에 이름을 올리는 현상과 비슷하죠."

브랜드명 d가 '하이트의 유일한 경쟁 상대는 하이트'라는 'de-hite'와 '하이트가 요구하고 소비자가 요구하는 맥주'란 뜻을 포함한 'demand' 등을 내포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d는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다.

◆ "더이상 '원 브랜드 위너'는 없다"…"경영의 지속가능성은 브랜드와 품질에 달렸다"

"장기 불황에다 외산 맥주와 경쟁도 더 치열해지고 있어요. 무엇보다 다양한 맛을 원하는 소비자의 입맛도 갈수록 까다롭게 적응해 나가고 있죠. 앞으론 '국민 맥주'로 불린 하이트나 카스가 누려온 '원 브랜드 위너'가 등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분명한 건 다양한 맥주를 구경하고 골라 마시는 '선택 시장' 분위기로 흘러 갈 겁니다."

불황에 지갑을 열지 않는 소비자의 '작은 사치'를 위해 하이트진로는 주변 여건에 흔들리지 않고 다양한 브랜드와 제품을 내놓을 작정이다. 지난달 초 불과 1%의 국내 소비자를 붙잡기 위해 만든 에일(ale) 맥주 진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에일은 맥주통 위에서 섭씨 18∼25도로 효모를 발효시킨 맥주다.

"하이트진로 역시 불황이 길어지면서 위기 의식도 커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건강한 회사 경영의 지속가능성은 결국 좋은 브랜드와 품질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소비자들이 다양한 맛의 맥주를 요구한다면 '맥주 경영'도 이 방향으로 포커스를 잡아야만 할 것입니다."

한경닷컴 정현영 기자 j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