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닭싸움'이라 무시당하던 종합격투기, 주류스포츠로 키워…미국 '5대 스포츠' 자리 넘본다
미국의 5대 스포츠는 미식축구(NFL), 야구(MLB), 농구(NBA), 자동차 경주(NASCAR), 아이스하키(NHL)다. 수십년 동안 이 순위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무섭게 성장해 판도를 깨려는 스포츠가 있다. 종합격투기 리그인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 닭싸움’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종합격투기는 이제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주류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미국 언론의 조사에 따르면 지속적으로 돈을 내고 관련 상품을 사는 열성팬 숫자에서는 UFC가 이미 NHL을 뛰어넘었다. 경제위기로 NBA가 매년 수천억원의 적자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UFC는 흑자 행진을 달리고 있다. 한국에서도 UFC에 진출한 김동현, 정찬성 선수 등이 다른 스포츠 선수들에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UFC 급성장의 배경에는 데이나 화이트 최고경영자(CEO·43)의 역할이 컸다. 화이트 CEO는 2001년 UFC를 200만달러(약 21억원)에 사들였다. 최근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추산한 UFC의 기업가치는 최소 10억달러 이상에 달한다. 13년 만에 기업을 500배나 키운 것이다. 20대에 라스베이거스의 체육관에서 복싱 코치를 하던 그의 재산은 지난해 기준 1000억원이 넘는다.

◆“원칙을 세워라”

화이트 CEO는 어린 시절부터 복싱, 태권도 등 각종 무술을 익혔다. 스스로를 ‘격투기에 미친 괴짜(nerd)’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보스턴대에 입학했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어린이들을 위한 복싱 강좌를 열었다. 장사에도 재능이 있었다. 199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체육관 3곳을 개설했다.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종합격투기 선수들의 매니지먼트 회사도 세웠다. 당시에도 UFC 등 종합격투기는 존재했다. 하지만 과도한 폭력성 탓에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고 있었다.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은 공개적으로 “종합격투기를 없애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종합격투기의 매력을 간파한 화이트는 그때가 UFC를 사들일 적기라고 판단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카지노 재벌인 퍼티타 형제와 함께 2001년 UFC를 200만달러라는 헐값에 인수했다.

그 시절 UFC는 뚜렷한 규칙이 갖춰지지 않은 채 운영됐다. 박치기는 물론 심지어 낭심차기도 가능했다. 화이트는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다. 급소 공격을 금지시키고, 훈련받은 심판들을 투입해 위급상황이 생기면 바로 경기를 멈추게 했다. 지금도 선수들의 치료비를 지원하고 훈련 중 부상을 입으면 무조건 경기를 취소한다. 사람들은 서서히 UFC를 ‘싸움’이 아닌 ‘스포츠’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UFC가 세계 최고의 종합격투기 리그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원칙 중심 경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2000년대 초반 종합격투기의 메이저리그는 일본 ‘프라이드(Pride)’였다. 하지만 프라이드는 승부를 조작하고, 자국 스타를 띄우기 위해 일부러 약한 외국 선수와 경기를 붙였다. 만화 같은 경기를 만들기 위해 150㎏이 넘는 거인을 80㎏의 작은 선수와 싸우게 하기도 했다. 결국 조직폭력배 집단 야쿠자와 연계된 것이 드러나며 몰락했다.

화이트는 승부조작을 철저히 배제했다. 스타성이 없더라도 강한 선수는 좋은 대우를 해줬다. 체급을 엄격하게 구분했고, 불법 약물 사용 검사도 일본보다 엄격하게 했다. 사람들은 점점 종합격투기의 강렬함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정치권에서도 종합격투기를 스포츠로 받아들였다. 현재 미국에서 뉴저지주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주가 종합격투기를 허용하고 있다.

◆“사업 모델을 혁신하라”

화이트는 2001년 UFC를 인수한 뒤 규칙을 정립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2005년까지만 해도 적자를 면치 못했다. 대중의 인식을 한번에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워낙 적자폭이 커지자 자금을 지원한 퍼티타 형제가 매각을 고려할 정도였다.

이때 그는 묘안을 짜냈다. 당시 유행하던 리얼리티쇼를 종합격투기에 접목시킨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격투기를 수련하는 젊은 선수들을 모아 합숙을 시켰다. 그리고 토너먼트 방식으로 최강자를 가렸다. 이를 케이블 TV를 통해 방영했다. ‘전국 최강자’를 뽑는 프로그램에 서서히 대중의 관심이 쏠렸다. 결승에 오른 포레스트 그리핀과 스테판 보너는 역사에 남는 혈투를 벌였다. 영화 ‘록키’의 한 장면 같은 이 경기에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UFC는 갑자기 성공 가도에 진입했다.

복싱, 격투기 등 격투스포츠의 주 수입원은 PPV(Pay Per View)다. 돈을 낸 시청자들에게만 방송을 틀어주는 시스템이다. 2005년 이후 PPV가 날개 돋친 듯 팔리며 UFC는 큰 수익을 거뒀다. 하지만 브록 레스너 등 유명 스타들이 은퇴하면서 2010년부터 PPV 수익이 제자리에 머물렀다. UFC의 위기론이 나왔다.

화이트는 다시 한번 승부수를 던졌다. 지난해 미국 5대 지상파 방송인 폭스와 방송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7년간 7억달러라는 종합격투기 사상 최고 액수의 계약이었다. 공중파를 통해 일부 UFC 대회를 무료로 방영하면서 팬을 확보해 PPV 판매량을 늘리겠다는 전략이었다. 공중파에서 정기적으로 종합격투기가 나오면서 UFC의 인지도는 한층 높아졌다.

화이트는 미국 시장을 정복한 여세를 몰아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미 일본, 브라질, 캐나다, 영국에선 성공적인 이벤트를 개최했다. 그는 “중국, 인도의 방송국과 협상하고 있고 한국에도 반드시 진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집어 삼켜라”

화이트의 경영에 ‘공생(共生)’은 없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철저히 무너뜨린다. 소송도 불사한다. 경영 방식이 정보기술(IT)업계의 거인 애플과 비슷하다는 평을 받는다.

2008년엔 일본의 프라이드가 흔들리자 통째로 사들였다. 비슷한 시기 스포츠 의류업체 어플릭션이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라는 ‘돈줄’까지 확보해 종합격투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자 UFC에 소속된 선수들에게 절대 어플릭션의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어플릭션은 단 두 번의 대회만 열고 UFC에 백기를 들어야 했다. 스트라이크포스라는 단체도 한때 UFC의 아성을 위협했지만, 이마저도 사버렸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에 중소 격투기 단체들이 많지만, 조금만 우수한 선수가 있으면 바로 영입한다. 작은 단체들은 “UFC 등쌀에 살아남기 힘들다”고 호소할 정도다.

이 때문에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며 자신의 이익만 챙긴다는 비판도 받는다. 실제로 UFC 선수들의 대전료는 비슷한 규모인 복싱에 비해 턱없이 적다. 하지만 화이트는 “나는 체육관에서 땀 흘리는 수많은 운동선수들에게 꿈을 줬고, 수백명의 백만장자를 만들어줬다”며 굴하지 않는다.

최근 인터뷰에선 “하루에 3시간만 자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일하는 데 보낸다”며 “잠자는 것도 아까울 정도로 이 스포츠를 사랑한다”고 강조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