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빌 게이츠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열린 테드(TED) 콘퍼런스에 연사로 나섰다. TED로부터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국제적 문제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청중들은 정보 불평등, 정보화의 미래 등 거대한 주제의 강연을 기대했다. 연단에 올라선 그는 대뜸 말라리아 얘기를 꺼냈다. “말라리아로 한 해 100만명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만 말라리아로 고생하란 법은 없습니다. 말라리아는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이 말라리아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요지였다. 그리고 게이츠는 준비한 병을 꺼내들어 뚜껑을 열었다. 모기떼를 강연장에 풀어놓은 것. 강연장에는 모기들이 활개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뉴욕타임스는 “모기쇼는 말라리아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효과적인 쇼였다”고 평가했다.

TED의 강연은 게이츠가 한 것처럼 내용과 형식이 자유롭다. TED의 모토인 “널리 퍼져야 할 아이디어(Ideas worth spreading)”에만 맞으면 된다. TED 영상들은 웹사이트에 공개돼 2억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TED콘퍼런스를 좋아한다고 평한 페이스북 가입자는 200만명에 이른다.


◆평범한 사람도 강연하는 ‘지식축제’

TED는 1984년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인 리처드 사울 위먼과 방송 디자이너 해리 마크스가 단발성으로 기획한 국제 콘퍼런스에서 시작됐다. 이 행사는 기술과 디자인, 방송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자리였다. 당시로서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기술(T)·엔터테인먼트(E)·디자인(D) 등 세 가지 요소를 하나로 묶어보자는 취지였다. 이 행사는 부정기적으로 열리다 1990년부터 연례행사로 자리잡았다.

특이한 강연회 정도로 여겨지던 TED는 2001년 언론인 출신 크리스 앤더슨의 새플링재단이 인수하며 전환기를 맞았다. 앤더슨은 1994년 창간한 ‘비즈니스 2.0’ 등 130개 잡지사를 보유한 미디어 재벌이었다. 앤더슨은 TED를 엘리트들의 모임에서 다수에게 개방된 형식으로 바꿨다. 과거 초청장을 받은 사람만이 참가할 수 있었던 TED콘퍼런스를 누구나 동영상을 통해 볼 수 있도록 바꿨다. 또 유명인사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가치 있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강단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강연만 변한 것이 아니다. TED콘퍼런스가 열리는 동안에는 강연장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함께 모여 생중계되는 영상을 보면서 식사와 토론을 한다. 마치 2002년 월드컵 때 시청앞 광장에서 함께 게임을 즐겼던 것과 비슷한 분위기가 TED 강연장 밖에서도 펼쳐진다. TED가 ‘지식 축제’로 진화한 셈이다.

앤더슨은 “한 명의 천재가 가진 아이디어보다 여러 사람의 지혜(collective wisdom)가 더 낫다”며 TED의 성격을 이렇게 바꿨다. TED는 일반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있다. 앤더슨은 올해 14개국을 돌며 2013년 TED 콘퍼런스 강연자를 뽑는 오디션을 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지난 5월 오디션이 열렸다.

◆누구에게나 18분만 강연 허용

TED가 전세계로 확산되는 데는 유연한 저작권 정책도 크게 기여했다. TED의 이름을 걸고 공개되는 콘텐츠에는 두 가지 단서만 붙는다. ‘편집하지 말 것, 영리목적으로 사용하지 말 것.’ TED는 최근 각 국가에 있는 특정 단체들이 스스로 TED의 라이선스를 받아 유사 강연회도 주최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테드엑스(TEDx)’라고 불리는 이 강연은 현재 전세계 60여개 국가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 강연을 주최하는 단체는 750여개가 넘는다. 한국에서는 2009년 ‘TEDx명동’이란 콘퍼런스가 처음 탄생했다. 지금은 70여개의 TEDx가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에 올라간 영상은 각국 언어로 번역돼 제공된다. 자막을 넣는 사람은 각국에 퍼져 있는 수천명의 자원봉사자들이다. TED에 출연하는 연사들 역시 돈을 받지 않고 강연한다. TED 강연을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알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힘을 보탤 뿐이다.

TED콘퍼런스는 개방성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엄격히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어떤 강사라도 강연 시간은 ‘18분’으로 제한된다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과 영국 총리도 TED에서는 12세 어린이와 똑같은 시간을 배정받는다. 예외는 없다. TED 측은 “18분이 사람들이 집중력을 갖고 주목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고 설명했다. 앤더슨은 “18분 동안 아이디어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시간 제한은 효율적이고 인상적인 강연을 하도록 유도한다는 설명이다. 18분의 시간은 TED 강연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동영상 확산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식지 않는 TED 열풍

TED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지난달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린 TED 글로벌 콘퍼런스 참가비는 6000달러에 달했다. 자발적으로 유용한 지식을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TED가 취지에 맞지 않게 참가자들에게 거금을 받는다는 비판이 나왔다. 2008년 TED에서 강연을 한 투자 전문가 나심 탈레브는 “TED는 과학자나 사상가들을 저급한 수준의 연예인이나 광대로 만드는 흉물덩어리”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비판에도 매년 봄과 여름 두 차례 열리는 콘퍼런스에 참가하기 위해 최소 6개월 전에 참가 신청을 해야 하는 등 인기는 여전하다. 돈만 내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TED에서 요구하는 참가신청서도 꼼꼼히 써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1000여명만이 간신히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다. 식지 않는 TED의 열풍에 대한 앤더슨의 답은 ‘인간의 본성’이었다.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한 앤더슨은 “국가와 국적에 관계없이 누구나 영감을 받고 싶어한다”며 “강연의 인기는 인간의 호기심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TED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미래 사회를 구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김동현 기자 3co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