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 암 투병한 어머니 생각에 천장 그림 거는 작업 몰두했죠"
“다섯 살 때 6·25 전쟁을 겪었습니다. 비행기 소리만 나면 방공호에 숨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때의 경험이 우주를 주제로 한 제 작업의 원동력이 됐죠.”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 현대 강남점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는 재미화가 정연희 씨(67)는 “현대사회의 정신적 빈곤과 갈등, 병폐를 우주라는 절대존재로 치유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며 활동하는 정씨는 수십, 수백광년 거리의 우주공간을 그려온 작가. 거대한 우주 속의 인간 존재를 화폭에 담아내는 독특한 기법 덕분에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 ‘이달의 작가전’, 케네디아트센터(1999),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2003)에 초대됐다.

그는 “도시와 국가의 죽음, 부활을 주제로 작업하다가 그 치유의 방안으로 우주를 발견했다”고 얘기했다.

“우주는 자연의 모체이자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신비롭고 숭고한 공간이죠. 인간의 몸을 감싸는 치유와 안식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4~5m짜리 대형 캔버스를 천장과 바닥에 설치한 전시장은 관람객들에게 우주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선사한다. 정씨는 관람객이 편히 쉬면서 감상할 수 있도록 천장에 화폭을 거는 작업을 시도했다. 천장에 조각을 거는 예는 많지만 그림을 거는 것은 드문 일이다.

“친정 어머니가 암으로 1년 반 동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지냈어요. 어머니를 위로하고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궁리하다 돌아가신 후에야 천장에 화폭을 걸게 됐죠.”

그는 기다란 캔버스를 천장에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보는 이의 시선은 한 캔버스에서 다른 캔버스로 옮겨간다.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램프의 불빛이 천장을 비춘다.

자연의 흐름을 중시한다는 그는 “어둠은 자유와 평화를 잉태한 것이라는 생각에 빛을 통해 밤을 표현했다”고 했다.

“빛을 소재로 활용한 것은 1990년대 말 인도 여행 때부터입니다. 20년 이상 살았던 캘리포니아는 강렬한 햇살과 그림자가 있는 곳이죠. 그러나 인도에서 색다른 문화와 정신을 느꼈어요. 동굴사원 안에서 불상으로부터 스며나오는 빛을 볼 수 있는데 그게 아주 평화로워 보였거든요. 그때부터 빛이 사물에서 발산되는 모습을 그려왔습니다.”

그가 대형 캔버스에 작업하는 과정은 독특하다. 작업실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 빗자루나 롤러로 물을 흠뻑 적신 다음 묽은 아크릴릭 물감을 붓고 캔버스 모퉁이를 움직이며 고루 퍼지도록 한다. 천이 마르면 작업을 반복하면서 여러 가지 색깔을 입힌다. 완전히 말린 다음에는 천에 생긴 무늬를 살리며 붓으로 배, 별, 물고기 등을 그려 완성한다.

‘저 멀리, 그리고 가까이’를 주제로 내달 16일까지 계속하는 이번 전시에는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최근작 50여점을 내걸었다. (02)519-08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