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3세 자존심 대결…현대家 정지선, 패션전쟁 가세
1993년 신세계백화점이 이마트 1호점을 냈을 때 롯데와 현대백화점은 콧방귀를 뀌었다. ‘할인점이 한국에서 되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후 할인점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고, 이마트는 백화점을 능가하는 신세계의 1등 사업분야가 됐다. 롯데는 5년 늦은 1998년 할인점 사업에 뛰어들며 추격에 나섰지만, 현대는 ‘진출하기엔 이미 늦었다’며 포기 선언을 했다. 현대로선 엄청난 ‘성장 시장’을 라이벌에게 고스란히 내준 셈이었다.

그런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을까. 현대백화점그룹은 국내 1위 여성복 업체인 한섬을 13일 인수, 패션 분야에서 앞선 롯데와 신세계에 도전장을 던졌다. 현대는 이날 현대홈쇼핑을 통해 정재봉 한섬 사장(71) 및 가족이 보유한 회사 지분 34.6%를 4200억원에 사들여 경영권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의 인수금액은 당초 협상 대상자였던 SK네트웍스가 한섬 측에 제시한 인수희망가보다 더 많다”면서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패션업을 하려면 한섬 같은 회사를 손에 넣어야 한다’며 올초 정재봉 사장을 만나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가 SK에 비해 ‘웃돈’을 줘가며 한섬을 손에 넣은 건 패션업을 둘러싼 백화점 업계의 현 상황이 할인점 진출 경쟁이 벌어졌던 1990년대와 비슷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외 브랜드 수입·판매에 주력했던 신세계(아르마니 코치 등)와 롯데(훌라 타스타스 등)는 지난해 각각 여성복 브랜드인 톰보이와 나이스크랍을 인수하며 패션사업 강화에 나섰다. 단순 수입·유통에서 벗어나 ‘제조’ 분야로 패션사업을 확대한 것이다. 여성복 브랜드 쥬쉬꾸뛰르 수입·판매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패션사업이 없었던 현대로선 자칫 ‘할인점의 전철’을 밟을 수 있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현대백화점그룹 관계자는 “현대홈쇼핑을 인수주체로 내세운 이유는 매년 1~2개씩 새 점포를 내고 있는 백화점에 비해 자금여력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이 한섬을 인수함에 따라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의 손녀인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이건희 삼성 회장 차녀)과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명희 신세계 회장 장녀),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손자인 정지선 회장 등 재계 3세들이 패션사업에서 맞붙게 됐다.

정 회장이 한섬을 ‘찜’한 이유는 한섬 브랜드가 가진 강력한 위상 때문이다.

한섬은 지난해 매출 5023억원에 1051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린 국내 1위 여성복 업체로, 국내 최대 패션기업인 제일모직조차도 여성복에서만큼은 한섬에 한 수 접고 들어간다. 타임 마인 시스템 SJSJ 등 정상급 여성복 브랜드들이 모두 이 회사 소유이며, 발렌시아가 끌로에 랑방 등 요즘 뜨는 해외 명품 브랜드들의 국내 판권도 갖고 있다. 이 중 타임은 이서현 부사장이 이끄는 ‘구호’의 라이벌이며, 시스템과 SJSJ는 정유경 부사장의 ‘보브’ 및 ‘G-컷’과 고객군이 겹친다.

정재봉 사장은 이처럼 한섬을 탄탄한 패션업체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후계자를 키우는 데는 실패했다. 때문에 자신과 가족이 보유한 한섬 지분을 매물로 내놓았고, 2010년부터 SK네트웍스와 매각협상을 벌였다. 1년여에 걸친 협상은 작년 여름에 결렬됐고, SK네트웍스는 타임 등 6개 브랜드에 대한 중국 사업권을 따내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백화점그룹이 치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룹 관계자는 “한섬이 보유한 14개 특급 브랜드를 활용해 다른 백화점이나 홈쇼핑에선 볼 수 없는 차별화된 콘텐츠를 만들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패션업계에선 ‘궁합이 잘 맞는다’란 평가를 내놓고 있다. 한섬의 특급 브랜드들이 현대백화점의 고급스런 이미지를 한층 끌어올려줄 것이란 기대에서다. 현대백화점 입장에선 한섬 인수로 패션 외형을 단숨에 키우게 됐다. 현대의 패션 매출은 약 5200억원(기존 사업 포함)으로, 신세계(약 8000억원) 및 롯데(약 500억원·유니클로 등 투자업체 매출 감안 7000억원)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그룹 관계자는 “한섬을 시작으로 앞으로 적극적인 인수·합병(M&A)에 나설 계획”이라며 “한섬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정 사장에게 그대로 경영을 맡기고 임직원들의 고용도 보장키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현대백화점그룹은 최대주주로서 이사회를 통해 큰 틀의 방향을 정해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오상헌/민지혜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