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 이미 다 찼고 홀에도 한 자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약 안 하면 못하실 수도 있어요.”

지난 20일 베이징 시내 궈마오(國貿) 부근에 있는 베이징커리호텔(北京嘉里大酒店, 샹그릴라 호텔) 중식당 하이톈거(海天閣). 한 달 가까이 남은 내년 1월22일 저녁식사를 예약하겠다고 하자 종업원은 한 상(보통 10인분)에 최소 1만8880위안(340만원)이라며 메뉴판을 내밀었다. 가장 비싼 식사는 3만8880위안(700만원)짜리도 있었다. 이 가격에 15%의 서비스료를 별도로 받는다.

이날의 저녁 식사는 단순한 한 끼가 아니다. 중국인들이 1년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섣달 그믐날의 마지막 식사다. 온 가족이 새해를 맞으며 먹는 저녁 식사라는 의미로 옌예판(年夜飯)이라고 불린다.

◆고급호텔 옌예판 유행

중국인들에게 음력 12월31일인 추시(除夕)는 매우 중요한 날이다. 중국인들은 이날 저녁 가족 친지와 둘러앉아 함께 옌예판을 들며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 감옥에 가둔 죄수도 이날만큼은 집에서 가족들과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풀어줬다는 얘기가 전해올 정도로 옌예판의 전통은 각별하다.

과거에는 집에서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고 폭죽을 터뜨렸다. 한 해를 무사히 보낸 것에 대한 감사와 새해에도 건강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기를 바라는 의미다. 저녁 식사 후에는 온 가족이 모여 만두를 빚는다. 집에서 CCTV가 방송하는 설 특집 프로그램 춘제완후이(春節晩會)를 보면서 옌예판을 즐기는 게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소득이 늘어난 요즘에는 식당에서 값비싼 옌예판을 먹고 즐기는 게 유행이다. 고급 호텔 식당들도 더 화려하고 더 비싼 옌예판 상품을 내놓고 치열한 마케팅 경쟁을 벌인다. 옌예판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중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를 올리는 주범”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올해도 중국의 고급 식당들은 춘제 3개월 전인 지난 10월 말부터 옌예판 예약을 시작했다. 중국의 언론들은 “00호텔의 옌예판 예약이 마감됐다” “00호텔은 70%만 찼다”고 중계 방송을 할 정도로 옌예판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베이징만보에 따르면 베이징시 5성급 호텔들의 옌예판 예약률도 70%를 넘어섰다.

◆장수와 부 기원

중국인들은 옌예판을 먹으면서 새해엔 건강과 재부를 얻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옌예판 식탁에 오르는 음식들도 이들과 관련이 있다. 옌예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은 대표적으로 훈툰(만둣국의 일종) 생선 설떡 만두 장수면 등을 들 수 있다.

훈툰은 새해에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의미로 먹는다. 중국 신화에 반고씨(盤古氏)가 하늘과 땅을 갈라놓으면서 혼돈(混沌)의 시대를 끝냈다고 하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또 훈툰은 양식이 충족하다는 의미의 ‘훈툰’과도 음이 같아 새해에 풍족하게 살게 해달라는 의미로 이 음식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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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도 옌예판의 필수 음식이다. 중국어로 물고기를 뜻하는 ‘위(魚)’의 발음은 ‘새해에도 풍족하길 바란다’는 옌옌여우위(年年有余)에서 ‘풍족하다’는 의미의 위(余)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생선을 먹는 것은 새해에도 풍족하게 살게 해달라는 의미다. 중국식 설떡인 옌가오는 ‘매년 향상된다’는 옌가오(年高)와 발음이 같다.

만두는 모양이 과거 명나라에서 쓰던 화폐인 원바오와 비슷해 부자가 되라는 의미가 있다. 중국에서는 설날에 만두를 빚을 때 만두 속에 동전을 넣는다. 동전을 넣은 만두를 먹은 사람에게는 새해에 큰 돈을 버는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는다. 장수면은 중국말로 창미옌(長面)이라고 한다. 이름 그대로 오래 살기를 기원하면서 먹는 음식이다.

◆변질된 옌예판

베이징시에 따르면 지난해 옌예판 평균 가격은 한 상에 약 1300위안. 대략 800~5000위안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고급식당들을 중심으로 옌예판 경쟁이 심해지면서 전통적인 음식들 대신 바다제비집 전복 등 값비싼 요리가 옌예판 식탁에 오르고 있다. 요즘 베이징 5성급 호텔들도 수만위안짜리 상품들을 내놓고 예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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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비쌌던 옌예판은 항저우의 한 5성급 호텔이 팔았던 한 상에 19만9000위안(3500만원)짜리다. 메뉴는 최고급 전복, 동충하초, 야생자라탕, 일본산 홍삼, 장쑤성 양청호(陽澄湖)의 대게, 중국 동해산 다황위(민어의 일종), 바다제비집 등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15년산 마오타이 두 병과 2004년 프랑스산 포도주 두 병, 스위트룸 숙박권이 제공됐다. 일간지 쑤저우르바오는 “이 요리의 원가를 따져보면 8800위안 정도”라며 “옌예판이라는 명목으로 호텔들이 10배가 넘는 폭리를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베이징=김태완 특파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