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곁에 두고 싶은 책] 천 년 전 日 여인이 기록한 세상 인심
앞은 '얕보이는 것',뒤는 '밉살스러운 것'에 대한 설명이다. 그럼 '화나는 것'은?'편지나 답장을 써서 시종에게 보냈는데 고치고 싶어지는 것,급하게 바느질하면서 바늘을 뺐는데 실 끝에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것,권세가 하인이 찾아와 무례한 말을 하며 설령 기분 나빠도 자기네를 어떻게 하겠느냐는 듯 구는 것.'
천년 전 일본 여인이 기록한 세상 인심과 사람 마음이다. 그것 참! '마쿠라노소시'의 마쿠라(枕 · 베개)는 몸 가까이 은밀히 지니는 것,소시(草子)는 묶은 책이다. 우리말로는 '베갯머리 서책'쯤 되는 셈.993년부터 1000년까지 뇨보(女房 · 상궁)로 일했던 세이쇼나곤(淸少納言)의 수필집으로 일본 고전문학의 대표작이다.
저자는 뇨보라고 돼 있지만 이혼한 뒤 궁궐에 들어왔다 모시던 이가 사망하자 궐을 나가 다시 결혼했다는 걸로 봐 우리나라 상궁과는 성격이 다른,일종의 여성 관료였던 듯하다. 누군가 읽을 걸 염두에 두지 않고 쓴 글들은 솔직하기 이를 데 없다. 궁궐생활,자연과 풍속,남녀관계 등을 고루 다룬 300여편은 10세기 말 일본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방석처럼 곱게 정성 들여 짠 '고려식 다다미'를 하사받았다는 대목은 고려시대에도 다다미가 있었음을,양자와 사위 얘기가 잦은 건 일본의 가족제도가 일찍부터 우리와 달랐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동서고금 할 것 없이 똑같다 싶은 사람의 심사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절묘한 표현이다.
'손님과 얘기하는 데 안쪽에서 은밀한 소리가 들리는 것,사랑하는 남자가 술에 취해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것,본인이 듣는 줄 모른 채 그 사람 얘기를 한 것,학문 높은 사람 앞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아는 척 옛날 위인들 이름을 들먹이는 것.''민망한 것'에 대한 풀이거니와 '흔치 않은 것'의 예 또한 그렇다.
'장인한테 칭찬받는 사위,시어머니한테 귀염받는 며느리,주인 험담 안하는 시종,일하는 사람으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경우.'실물이 그림보다 나은 것은 '패랭이꽃 · 창포 · 벚꽃',그림이 실물보다 나은 건 '소나무 · 가을들녘 · 산골마을 · 산길'이요,멀고도 가까운 것은 '극락 · 뱃길 · 남녀사이'란 대목에 이르면 숨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
'기쁜 것'이란 대목은 좋은 글쓰기의 바탕이 읽기라는 사실과 함께 일본 수필집의 효시가 어떻게 탄생됐는지 일깨운다. '책의 첫권을 읽고 궁금하던 차에 다음 권을 읽게 됐을 때,다른 사람이 찢어버린 편지를 붙여서 몇 줄 읽게 됐을 때,공식적인 자리에서 읊은 노래나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노래가 좋은 평판이 나서 누군가의 비망록에 기록되는 것.'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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