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의 목화씨, 조선 경제를 뒤바꾸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산업혁명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국부 증진과 백성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일까. 목면(木綿)의 도입이 가져 온 의류 혁명이 대표적이다. 고려 말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비밀리에 가져온 목면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산업이 됐다.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신(曺伸)이 기록한 《소문쇄록》에는 목면 도입 정황과 산업화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소문쇄록》은 6000여자로 된 단편 수필집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주요 일화들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는 옛날에 무명이 없어 다만 삼 · 모시 · 명주실로만 천을 만들었는데,고려 말에 진주 사람 문익점이 일찍이 중국에 갔다가 목면(木綿)의 씨를 구하여 주머니 속에 감추어 넣고,아울러 씨 뽑는 기구와 실 잣는 기구를 가지고 왔다. 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그 방법을 전하여 100년도 못 되어 온 나라 안에 퍼져서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대체로 다 이 무명옷을 입었다. 또 그것을 돈으로 바꾸기도 하고 쌓아두기도 하는 일이 세상에 널리 행하여졌는데,삼베에 비하여 갑절이나 많이 쓰였다. (중략)옛날에는 그 나라의 부(富)를 물으면 말의 수효로 대답하였고,중국 사람은 동전이나 금 · 은으로써 빈부를 비교하였지마는,우리 동방에는 금 · 은이 나지 않으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전법(錢法)을 시행하지 않고 다만 무명으로 화폐를 삼았다. 무명 35자가 한 필이고,50필이 한 동(同)인데 쌓아둔 것이 많아야 1000동에 불과하였다. 근대의 재상 윤파평(尹坡平) · 상인 심금손(沈金孫)이 무명을 무려 1000여동이나 쌓아두었다가 갑자 · 병인 연간에 함께 뜻밖의 화를 입었다. '

위의 글은 문익점이 처음 목면을 우리나라에 전래해온 경위와 빠른 시간에 목면이 널리 퍼진 상황,목면이 화폐 기능을 하게 된 것 등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목면을 쌓아 부를 축적하였다가 화를 당한 재상과 상인의 이야기도 언급하고 있다.

《태조실록》에서도 문익점이 목면을 도입해온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여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던 당대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원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 갑진년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전객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100여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중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다시 본토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 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며칠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 을묘년에 익점을 불러 전의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나이 70세였다. '-《태조실록》 태조 7년 6월13일 기사 중.

《세종실록》에도 "문익점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이(利)를 일으켰으니,그 혜택을 생민(生民)에게 입힘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라며 그의 사우(祠宇)를 세워야 한다는 기록이 보이고 《정조실록》에도 문익점의 서원에 사액을 하라는 기록이 보여 그를 존숭하는 분위기가 조선시대 내내 지속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세기 전반 목면이 널리 보급되면서 물품 화폐의 주종은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었다. 15세기 국가에서 화폐로 공인한 정포(正布) 1필은 5승(升 · 1승은 80가닥),폭은 7촌,길이는 35척이었다. 조선시대 목면을 재는 자의 단위인 포백척(布帛尺) 1척이 46.8㎝인 것을 고려하면 1필은 16m38㎝가 된다.

목면은 세금 납부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에는 군역의 부담을 지는 대신에 군포를 세금으로 납부하게 했는데,1년에 정포 2필을 바치게 했다. 그러나 군포의 부담이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하자 영조는 균역법을 제정해 '반값' 군포를 내게 했다.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병주 < 건국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