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作名' 재미보는 野…본질 흐리는 구호만
'나쁜 투표,착한 거부''미친 소''강부자''고소영 내각'.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세력이 중요한 정국의 고비마다 내놓은 네이밍(작명)이다. 대부분의 작명은 성공했다. 짤막한 단어 하나로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다. 작명의 힘은 엄청나다.

현 정부 들어 정치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그럴듯한 네이밍으로 재미를 본 건 진보진영이었다. 오랜 대중 정치투쟁 경험에서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감성'을 파고드는 네이밍에 관한 한 보수진영을 압도한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촛불시위 때도 '미친 소,아웃' 등의 짧은 구호로 상황을 주도했다. 최근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인터넷을 새로운 '아이디어 뱅크'로 활용하는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나쁜 투표,착한 거부'는 트위터 이용자들의 아이디어다. 민주당 서울시당 관계자는 "'관제투표' '불법투표' 등을 두고 고민하다가 트위터 이용자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뜻밖에 '나쁜 투표'라는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밝혔다.

야당이 구호정치에 이점을 가진 환경적 요인도 있다. 논리를 방어하고 설명해야 하는 여당에 비해 공격자 입장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도 야당 시절에는 노무현 정부의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세금 폭탄'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국민들의 반(反)노무현 정서를 효과적으로 자극했다. '무능 진보'도 당시 한나라당의 대표적 구호였다. 반면 여당으로 바뀐 이명박 정부들어서는 수세 일변도다. 민주당 등 야권은 '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정권'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내각' 'MB 악법'등의 구호정치로 공세를 주도했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다. 오는 24일 서울시의 무상급식 투표를 앞두고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한나라당과 오세훈 서울시장 측,투표 거부를 유도하는 민주당 등 야권이 치열한 구호대결을 벌이고 있다. 전면 무상급식과 단계적 무상급식 가운데 어느 쪽이 옳으냐는 본질보다 감성형 작명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마치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상황이다.

현재까지는 야권의 구호가 눈길을 잡아끄는 데 성공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민주당의 '나쁜 투표,착한 거부'는 메시지가 명확하고 감성자극형이다.

반면 한나라당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구호는 선명하지 않다. '3조원을 아낄 수 있다'는 구호는 설명형인데다 전면 무상급식을 위한 서울시의 연간지원액 690억원과도 차이가 커 공감대를 얻기가 여의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21일 "집권당은 현안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야 국민들이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며 "때문에 '섹시한' 구호나 슬로건을 내세우는 데 한계가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