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나리오라면 참 잘만들어졌다. 전대미문이라 불리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것이 가져올 혼란에 대한 걱정 혹은 공포가 줄거리를 꾸민다. '미국이란 절대권력자가 사라진다면'이란 것은 생각해보지 않은 가설이다. 미국이 국가부도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신용등급을 강등당한 것은 당혹스럽다. 유럽에선 스페인 이탈리아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에까지 재정위기의 망령이 어슬렁거린다. 때마침 세계 금융시장의 한 축인 런던을 비롯한 영국의 주요 도시에서 방화와 약탈이 일어났다. 이 모든 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 자체가 흥행의 요소다.

이 드라마로 인해 최근 3주일 동안 세계 금융시장은 요동치고 있다. 미국 등 주요국 증시에서 하루에 수백포인트 이상 주가지수가 오르고 내리는 것은 다반사다. 엔화가치는 달러당 76엔대가 깨지며 신기록을 세웠다. 불안해진 돈은 금으로 몰리고 있다. 이달 초 온스당 1620달러였던 금값은 벌써 2000달러에 육박했다. 반면 유가는 추락 중이다. 세기적 불황과 같은 뭔가 큰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흥미를 끄는 대목도 있다. '재정지출 감소'를 신(神)처럼 섬기는 미국 공화당의 티파티그룹이란 '원리주의자'들이 미국을 쥐고 흔드는 모습을 목격했다. 뉴욕타임스의 여성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가 '워싱턴 전기톱 살인사건'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한 티파티그룹의 전의(戰意)는 결과적으로 미국과 세계 경제에 '테러'를 가했다.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갑자기 미국 국채의 신용등급을 강등,주군 격인 미국의 등에다 총을 쏘는 반전은 의외였다.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측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고,그래서 그 파괴력이 극단적으로 큰 사건을 말하는 '블랙 스완(black swan)'이 연속적으로 세계를 습격한 것이다.

문제는 블랙 스완이 이번 한 편의 드라마에만 머물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이 초래할 달러 약세,2년간 제로금리를 유지하겠다는 미국의 무기력증,말로는 '공조'를 이야기하면서 사분오열의 조짐을 보이는 유럽의 혼란 등 최근 국제사회에 형성된 새로운 환경은 뭔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어질 수 있다는 걱정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블랙 스완이란 말을 경제현상에 빗대어 유행시킨 미국의 투자전문가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블랙 스완은 부정하거나 예측할 수 없으며,숙명적으로 그것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한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쓸 곳엔 쓰되 재정의 건전성이란 대원칙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상당 기간 경기가 좋지 않을 것이란 점을 인식한다면,기업들이 불경기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밀어줘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주변에선 절박함을 찾아볼 수 없다. 반값 등록금,무상급식,무상보육 등 표를 의식한 정책 공방뿐이다. 여야 정치인들이 한쪽에서 '장군'을 부르면 다른 쪽에서 '멍군'을 부르며 포퓰리즘 원리주의자로 변질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속이 타들어간다. 이번 위기의 본질이 신뢰의 상실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블랙 스완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조주현 국제부장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