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신안은 72개의 유인도와 932개의 무인도로 이뤄진 군이다. 이번엔 1004개의 섬 가운데 7번째로 큰 섬인 '슬로시티' 증도(甑島)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지난 3월 개통한 증도대교를 건너 섬의 끝 우전해수욕장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기러기떼가 한겨울을 지내고 가는 밭이라 하여 깃밭(羽田)이라 부르던 곳이다. 백사장엔 엷게 낀 해무가 몇 사람의 관광객들과 더불어 느릿느릿 산책 중이다.

해송 숲 속으로 뻗은 '철학의 길'을 따라 걸어간다. 곽재구의 '전장포아리랑' 등 이따금 나타나는 시비를 바라보며 숲의 끝에 이르자 광활한 갯벌이 나타난다. 너른 갯벌을 가로지르는 길이 470m의 짱뚱어다리를 건너간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빛깔은 검고 눈은 튀어나와 물에서 잘 헤엄치지 못한다. 진흙 갯벌에서 잘 뛰어놀며 물을 스쳐 간다'고 짱뚱어를 묘사했다. 짱뚱어다리 아래 갯벌엔 정작 짱뚱어는 보이지 않고 방게들만 서성거리고 있다. 벌써 겨울잠에 들어간 것인가. 짱뚱어는 12월부터 3월까지 겨울잠을 잔다.

솔무등공원의 문준경 전도사(1891~1950) 순교비를 찾는다. 암태도에서 태어난 문준경은 이곳 증도에서 증동리교회 등을 짓고 병든 거지들을 돌보는 등 왕성한 선교활동을 펼치다 6 · 25 한국전쟁 와중에 좌익들에 의해 순교 당한 여전도사다. 어떤 것에도 순교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현대인들에게 멘토가 될 만한 분이다.

증도면사무소를 지나 증도대교 개통 이전에 사옥도 가는 배를 타던 버지선착장 길로 접어든다. 길섶에 줄지어 선 돈나무들의 노란 열매 속에 든 빨간 씨앗들이 의붓자식 같다.

◆국내 최대의 단일염전 태평염전

마침내 광활한 태평염전이 펼쳐진다. 여의도의 두 배나 되는 462만㎡의 간척지에 형성된 국내 최대의 단일염전이다. 이곳에선 국내 소금 생산량의 5%에 해당하는 1만5000t의 천일염을 생산한다.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는 자염법(煮鹽法)에서 현재와 같은 천일염 생산방식으로 바뀐 것은 1907년 인천 주안 염전이 생겨나면서부터였다. 강우량이 많아 천일염전이 불가능한 곳으로 인식되던 호남에 비로소 염전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40년 뒤였다. 1946년 문을 연 비금도의 구림염전에 이어 태평염전은 1953년 문을 열었다.

태평염전 들머리에는 소금창고(등록문화재 제360호)를 개축한 소금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안에는 소금의 역사와 제도,소금으로 만든 짱뚱어 등의 조형물,소금 생산 도구(대파 소파 수차 물고망치 염도계 돌롤러)와 결정지(토판 · 장판 · 타일판)를 재현해 놓았다. 박물관 벽에는 소금장수로 위장하며 살다가 고구려 15대 미천왕이 된 을불의 이야기,팔만대장경 경판의 습기를 빨아들이고 해충을 막기 위해 해인사 장경각 지반에 소금을 묻었던 이야기,신기전 제조와 매염제로도 쓰였다는 이야기 등을 적어 놓았다.

박물관을 나와 본격적으로 염전 탐방에 나선다. 서너 명의 염부가 결정지에서 부지런히 대파(소금물을 미는 고무래)질을 하고 있다. 천일염 생산은 염도 3% 정도 되는 바닷물을 저수지→수로→제1증발지(난치)→제2증발지(누테)→해주창고(강우나 월동에 대비해 소금물을 가두어 두는 창고)→결정지로 이동시켜 가며 점차 염도를 높여 소금을 추출하는 방식이다. 결정지에선 침전물 등 불순물을 긁어내기도 하면서 바닷물의 염도가 25도에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소금을 추출해 소금창고에 보관한다.

◆대세에 밀려 토판염은 설 자리를 잃고

기온이 25도 이하로 내려가는 10월 말이면 소금 작업은 끝이다. 그러나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염부들은 대파로 밀면서 시연(試演)을 벌인다. 염부들이 시연하는 결정지와 증발지 바닷물 아래가 온통 까맣다. 갯벌 위에 까만 PVC 장판을 깔아 채염(採鹽)하는 장판염 방식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까만 장판은 햇빛을 잘 빨아들여 생산량을 늘려주고 생산 시기를 앞당겨준다. 장판염은 토판염에 비해 소출도 세 배가량 더 나오는 데다 깨끗하고 품도 훨씬 덜 들지만 PVC에서 발생하는 환경호르몬이 문제다.

흙판에서 소금을 만드는 친환경적인 토판염은 장판염전에서 추출한 소금보다 미네랄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고 염도가 낮은 데다 맛도 순해 요리에 그만이다. 그러나 장판염보다 품이 많이 들고 생산 날 수도 훨씬 짧아 수지 타산을 맞추기 어렵다. 이런저런 어려움 때문에 20여년 전만 해도 토판염전이 대세를 이뤘던 우리나라 소금 생산은 급속히 장판염 생산방식에 자리를 내주었다. 현재 토판천일염 생산자는 온 나라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이곳 태평염전만 해도 전체 생산량의 0.6%인 180t 정도만 토판천일염일 뿐이다. 경주에서 일거리를 찾아와 이곳에서 1년 넘게 염부 생활을 했다는 김씨(44)에게 "염부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노숙보다는 낫지 않느냐"며 되레 반문한다.

◆소금보다 아름다운 생의 결정을 위해

다시 대파질을 시작하는 김씨를 뒤로 한 채 소금박물관 옆 산봉우리 전망대에 오른다. 끝없이 펼쳐지는 염전과 수십 개의 소금창고가 일대 장관이다. 소금창고 옆으로는 전봇대가 경비병처럼 늘어서 있다. 저 염전들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은 증발지다. 수많은 증발지들은 불과 몇 개에 지나지 않는 결정지를 위해 존재한다. 결정지는 증발지에 빚져 있으며,내 몸은 한여름 땡볕 아래서 대파를 놀리는 저 염부들의 수고로움에 빚져 있다. 그러니 세상이란 얼마나 정교한 존재의 사슬인가.

이제 곧 겨울이 오면 염전의 산성화를 막고 알칼리성의 양질 소금을 얻기 위해 트랙터로 결정지의 흙을 갈아엎고 돌롤러를 굴려 다지기를 반복하리라.조금 전 박물관에서 샀던 사진엽서를 들여다본다. 엽서에는 순백의 아름다운 소금꽃이 송이송이 피어 있다.

도종환의 시 '소금'의 몇 구절을 떠올린다.

'가장 뜨거운 햇살 또 시간을 지나/ 우리의 허영과 거짓들이 모두 비늘을 털고 날려간 뒤/ 비로소 양식이 되는 까닭을 알고 계셨다. / 육중한 짐 자전거 바퀴 위에서 튼튼히 삶을 궁글리며/ 형님은 한 번도 뜨거움이라 강조하지 않으셨다. '

소금꽃이 아름다운 건 허영과 거짓이라는 비늘 혹은 티끌들을 허공 속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허영과 거짓이 남아 있으면 소금은 결코 결정을 이루지 못한다. 소금은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보석이다. 저수지의 바닷물이 증발지를 거쳐 결정지에 도착해 소금이라는 보석이 되려면 20여일이 걸린다. 소금이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바닷물의 걸음걸이는 줄기차지만 차분하고 느리다.

또 3년 이상 묵혀 간수를 빼야만 소금에 든 염화마그네슘이나 황산마그네슘 등 쓴맛을 내는 성분이 사라져 좋은 소금 맛을 볼 수 있다. 느림과 기다림의 세월을 견뎌야 맛이 제대로 드는 소금의 길을 따라 살고 싶다. 그렇게 살다보면 실패투성이인 내 생애도 마지막에 이르러선 아름다운 결정 하나 이루지 않겠는가.

안병기 <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

◆ 여행 팁

짱뚱어다리 부근 광장에서는 토·일요일 및 공휴일에 '슬로시티 증도 친환경 녹색장터'가 열린다. 장터에서는 미네랄이 풍부한 쌀을 포함한 콩 고추 양파 등의 농산물과 김 낙지 민어 등 제철 수산물을 판매한다. 오랜 전통의 맛이 조화를 이룬 함초전,함초국수,팥죽 등 이색적인 먹을거리도 맛볼 수 있다. 소금박물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입장료는 어른 2000원,어린이 1000원.휴관일은 매주 화요일(7,8월 제외).홈페이지(saltmuseum.org)(061)275-0829


◆ 맛집

어쩌다 찬밥을 먹게 되면 이재무의 '밥알' 이란 시를 떠올리곤 한다. '갓 지어낼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 밥이 식어 가면서 일으킨 화학적 변화를 사랑의 원리에 대입하면서 한탄하는 시다. 찬밥을 먹으면서 인간의 속성에 대해 부질없이 회의하느니 밥알이 끈기를 잃기 전에 식사를 마칠 일이다. 신안군 증도면소재지 농협 옆 안성식당(061-271-7998)은 갤러리와 식당을 겸한 이색적인 곳이다. 낙지볶음과 짱뚱어탕을 권할 만하다. 짱뚱어탕 1만원,낙지비빔밥 1만2000원,낙지볶음(중) 3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