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체 결함 가능성 보다는 조종사 과실에 무게
충성심에서 또는 누군가 착륙 지시


10일 폴란드 대통령 내외를 태우고 가다 러시아 스몰렌스크 군 공항 부근에서 추락한 러시아제 Tu-154 여객기 추락 원인이 여전히 미궁이다.

일단 러시아 당국은 조종사 과실에 무게를 두는 듯 보인다.

알렉산드르 바스투르킨 연방 대검찰청 수사위원회 위원장은 11일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에게 "예비 조사를 벌인 결과 사고가 비행기의 기술적 결함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며 "기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회항 지시를 거부하고 착륙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사고 비행기는 사용한 지 26년이 된 비행기로 지난해 12월 러시아 사마라주 아비아코르 항공정비 공장에서 점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공장의 알렉세이 그세프 사장은 국영 TV 방송 `러시아-24'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비행기 엔진을 수리했고 전자 및 항법 장비도 새로 갈았으며 실내장식도 새롭게 했다"면서 "비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비행기와 교신한 관제탑 통제관은 "몇 차례 착륙 시도를 하고 나서 조종사가 한 번 더 착륙할 뜻을 비쳤다"면서 "고도가 얼마냐고 물었는데 교신이 끊겼다"고 말했다.

결국, 사고 비행기가 구형인 만큼 항법 보조장치, 지상충돌 경보장치 등의 첨단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을 수는 있어도 어떤 기계적 결함에 의한 사고는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에 따라 수사관들도 왜 조종사가 관제탑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는지에 초점을 맞춰 조사를 벌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설(說)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기장의 `충성심'이다.

대통령 전용기를 책임진 사람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심리적 중압감이 작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대통령이 행사 시간에 늦지 않게 하려고 관제탑의 회항 요구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착륙을 강행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 하나는 누군가의 지시로 착륙을 감행했을 가능성이다.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도 전날 "짙은 안갯속에 착륙 시도를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조종사가 누군가의 지시를 따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폴란드 법상 군통수권자인 대통령만이 항공기 정지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사망한 레흐 키친스키 대통령이 이런 지시를 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지난 2008년 8월 카친스키 대통령의 그루지야 방문 때 기장과 벌인 일화가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카친스키 대통령은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 공항의 기상 상태가 나빠 착륙이 어렵다는 기장의 말을 듣지 않고 착륙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기장은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비행기를 아제르바이잔으로 돌렸고 카친스키 대통령은 자동차를 이용해 그루지야를 방문했다.

당시 카친스키 대통령은 "조종사가 되려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면서 귀국 후 이를 문제 삼겠다고 공언했다.

따라서 카친스키 대통령이 정부 인사들을 대거 동원해 러시아와 악연이 있는 `카틴 숲 ' 방문길에 나선 상황에서 회항 대신 착륙을 택했고 이에 사고 여객기가 4번이나 착륙을 시도하다 결국 사고가 났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것이 관측통들의 분석이다.

카친스키 대통령을 포함한 폴란드 정부 대표단은 사고 당일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지난 1940년 옛 소련 비밀경찰이 폴란드인 2만 2천 명을 처형한 '카틴 숲 학살 사건' 추모 행사에 참석하려고 러시아를 찾았다가 변을 당했다.

첫 번째 착륙 시도 전부터 연료를 버린 것도 기체 이상보다는 처음부터 비상 착륙을 염두에 두고 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고기에 앞서 착륙할 예정이었던 또 다른 비행기도 짙은 안개 때문에 회항했다는 점에서 착륙 시도는 무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항공 당국이 비행기록장치(블랙박스)에 대한 해독 작업을 벌이고 있지만 사고 원인을 밝혀줄 실마리가 나올지, 과연 조사 결과를 공개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와 관련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12일 러시아가 폴란드 조사관들을 부르긴 했지만, 원인과 관련해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에서 마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유럽의회 폴란드 대표인 아담 비엘란은 카친스키 대통령의 쌍둥이 형인 야로슬라브 카친스키 전 총리가 카친스키 대통령과 사고 36분 전에 통화를 했다고 폴란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카친스키 전 총리가 동생에게 "스몰렌스크에 도착했느냐"라고 묻자 카친스키 대통령이 "아직 아니다.

곧 도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hyun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