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서바이벌 마케팅] 싸다고 다 잘팔리나…1000엔짜리 바지에도 '품격' 담아야
일본 도쿄의 번화가 긴자 한복판에 있는 중저가 캐주얼의류 브랜드 유니클로 매장.봄상품 세일 중인 지난 18일 저녁, 매장은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기획상품으로 나온 폴로티와 면바지를 색상별로 두세 개씩 장바구니에 담는 직장인,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브라톱(브래지어 패드가 붙은 여성용 윗옷)을 고르고 있는 주부,콤비용 재킷을 입고 거울에 비춰보는 중년 신사에 이르기까지 고객층도 다양하다.

내수 침체에 허덕이고 있는 긴자에서 요즘 손님이 북적대는 곳은 유니클로 매장뿐이다. 프랑스의 루이비통이 점포 신설 계획을 철회하고 40년 역사의 일본 최대 보석점 미키 긴자점이 지난해 문을 닫았다. 하지만 유니클로는 긴자점 면적을 1.5배로 확장했다. 지난해 9~11월 중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0%,영업이익은 49% 증가했다. 유니클로의 성공 비결로는 비슷한 캐주얼보다 20~30% 싼 '가격 파괴'가 주로 꼽힌다. 때문에 유니클로가 일본의 디플레이션(경기침체에 따른 지속적 물가하락)을 부채질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가격이 싸다는 것만으로 유니클로의 눈부신 성장을 모두 설명할 순 없다. 유니클로 제품엔 저렴한 가격 외에 기능성과 디자인이란 '플러스 알파'가 있다. 소위 '하류의 상(上)'이다. 하류의 상은 일본의 마케팅 전문가인 미우라 아쓰시의 책 '하류사회'에서 나온 말.1990년대 장기 불황으로 중산층이 붕괴돼 대부분의 사람이 하류가 된 상황에서 그래도 남들과 차별화하려는 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했다.

최근 2~3년간 유니클로의 최대 히트작은 겨울 내복인 '히트텍'이었다. 일본에서만 6400만장 이상 팔린 히트텍은 한국에서도 인기다. 이 히트텍은 몸에서 발산되는 수증기를 흡수해 열을 발생시키고 섬유 사이의 공기층이 열을 차단하는 기능성 신소재로 만들어졌다. 저렴한 가격에 실용적 기능을 갖춘 것이다. 대표적인 '하류의 상'이다. 유니클로가 히트시킨 브래지어 기능이 합쳐진 민소매 여성 속옷이나 겉옷인지 내복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되게 디자인한 내복 등도 모두 '하류의 상'이다.

일본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다국적 중저가 의류 브랜드인 헤네츠&마우리츠(H&M)도 비슷한 경우다. H&M의 강점은 무엇보다 '저렴하면서도 멋지다'는 것이다. 명품을 사기에는 돈이 없지만,그래도 스타일이 좋은 옷을 입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 H&M이다. H&M을 세계 3위 매출 규모의 패션 업체로 키운 롤프 에릭손 최고경영자(CEO)는 "경기침체기엔 지갑이 가벼워진 소비자들이 값비싼 명품보다는 저렴하면서도 패셔너블한 '패스트패션(fast fashion:패스트푸드처럼 유행을 빠르게 찍어낸다고 해서 붙은 명칭)'을 찾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소비자로부터 인기를 모으는 일본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무인양품(無印良品: MUJI)'에서도 불황기 소비 코드인 '하류의 상'을 읽을 수 있다. 무인양품은 좋은 품질의 제품을 낮은 가격에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싼 가격으로 확보할 수 있는 양질의 친환경 소재 발굴,제품의 핵심 기능과 관계없는 광택 염색 등 불필요한 공정의 생략,로고 등의 장식을 최소화한 포장의 간략화 등이 특징이다.
[일본의 서바이벌 마케팅] 싸다고 다 잘팔리나…1000엔짜리 바지에도 '품격' 담아야
한마디로 '거품을 뺀 실용성'으로 불황기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인양품의 컨셉트는 심플한 디자인과 기능을 추구하는 소비 트렌드와 맞아떨어져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불황기에도 불구,게임기 시장을 제패했던 닌텐도는 어떨까. 닌텐도의 히트상품 위(Wii)와 DS에도 '하류의 상'이 숨어 있다. 불황 때는 사람들이 외출이나 여행을 자제하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 게임기의 수요가 증가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모든 게임기가 잘 팔리는 건 아니다. 여가활용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절약' 개념 외에 소비자들은 '플러스 알파'를 원한다.

닌텐도가 성공한 포인트가 바로 그 '플러스 알파'다. DS는 단순 게임뿐만 아니라 영어 학습,지능 개발 등 교육적인 게임 타이틀을 개발해 게임기에 대한 부모들의 저항감을 최소화했다. 위는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운동 삼아 즐길 수 있는 게임기라는 게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세계적 경영컨설턴트인 오마에 겐이치 박사는 "소비자들은 불황이라고 해서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니즈(Needs)를 포기하지는 않는다"며 "오히려 소비 여력이 줄어든 만큼 제품을 고르는 소비자들의 눈이 더욱 까다로워진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다양한 제품을 이미 경험해 본 소비자들은 저렴한 가격에도 좋은 품질과 기능의 '보석'을 찾길 원하다는 얘기다. 불황에도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한국 기업들도 되새겨볼 만한 대목이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