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로 해외 투자은행(IB)들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 기업금융 시장에서 국내사들이 선전하고 있다.

올 들어 기업공개(IPO)는 대우증권이 5400만달러 규모를 주관해 1위에 오른 것을 비롯해 국내사가 모두 차지했다.

회사채 발행에서도 우리투자증권 대우증권 KB금융지주 산업은행 동양종금증권 등 국내사가 상위권을 휩쓸었다. M&A 재무자문에선 모건스탠리 JP모건 등 외국계가 1,2위를 기록했지만 삼성증권 우리투자증권 한국금융지주 등이 10위권 안에서 활약하고 있다.

국내시장에서 '토종' 증권사들의 선전이 두드러지면서 최근엔 외국계 IB들이 딜을 따내기 위해 국내사가 만든 컨소시엄에 참여하려고 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우리투자증권은 '우투 컨소시엄'에 끼워달라는 외국계 IB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다.

임기영 대우증권 사장은 "해외 IB들이 주춤하고 있는 현 상황은 우리에겐 실력을 기를 절호의 기회"라며 "1~2년 뒤엔 해외 IB들이 전열을 정비해 다시 돌아올 것인 만큼 모처럼 잡은 기회를 도약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증권사들이 기업금융 관련 IB업무에서 쌓은 실력과 노하우를 갖고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특히 국내 코퍼레이트IB(CIB) 시장의 호황을 발판으로 아시아 IB시장 진출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제살깎기 식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레드오션'으로 변해가는 국내시장을 벗어나 아시아 IB시장에서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삼성 대우 등 일부 대형 증권사는 홍콩을 거점으로 아시아 IB시장 진출에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증권은 이달 초 홍콩 도이치뱅크의 아시아 지역 스트래티지스트(투자전략가)였던 콜린 브래드베리를 홍콩 현지 리서치센터장으로 임명한 데 이어 최근 홍콩 법인의 기업금융 및 자기자본투자(PI) 담당 책임자로 외국계 인력을 영입했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다음달 말까지 홍콩에서 50여명의 A급 인력을 뽑기로 했다"며 "이를 기반으로 현지 IB업무에서 경쟁력을 높여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우증권도 홍콩에서의 IB 업무를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모회사인 산업은행과 시너지 효과를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증권사들은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도 해외 IB시장에 도전장을 냈었다. 하지만 해외 부동산과 자원개발 프로젝트 등에 무분별하게 PI를 시도했다가 금융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막대한 평가손을 입은 채 돈이 묶여 버렸다. 김대영 우리투자증권 IB사업부 그룹장은 "국내사들이 외국계 IB들에 비해 PI가 취약하지만 결국엔 이 분야에서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지난해 겪은 어려움을 값진 교훈으로 여기고 새롭게 도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증권업계가 스스로 수수료 덤핑 경쟁을 지양하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주문이다. 최근 한 업체의 주관사 선정 과정에서 모 증권사가 수수료율을 업계 평균치의 30분의 1 수준으로 써내 다른 증권사들로부터 '지나친 덤핑'이란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한 중견 증권사 사장은 "과도한 수수료 덤핑 경쟁은 IB업무 실력을 키울 기회를 없애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국내사들이 이번 호기를 살려 아시아 IB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려면 정부의 지원도 필수적이란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중국 정부의 지원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중국은 자국 공기업의 대규모 해외 IB딜에 반드시 자국 IB를 공동 주관사 자격으로 끼워넣고 있다. 이 덕분에 중국 IB들은 다소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트랙 레코드(실적)'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장경영 기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