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토론하고 사무실에서 강아지 키우고 디지털에 아날로그 감성 입히고

지난 2일 오후 국내 한 휴대폰 업체의 디자인 사무실 앞 야외 계단.연구원인 정석현씨는 3년 전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그는 곧 출시될 고가 휴대폰 개발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에 소속돼 있는데 마무리 단계까지 온 이 제품의 포장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포장의 질적 수준을 놓고 '포장 비용이 고스란히 제품 가격에 반영될 것'이라는 의견과 '그렇다 하더라도 소비자가 상자를 여는 순간부터 럭셔리함을 느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선 것.정씨는 담배를 비벼 끈 뒤 회의장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5시간.격론 끝에 '패키지보다 제품 자체를 고급화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작년에 약간 호들갑스럽게 내놓은 제품 포장이 고객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정씨는 "이 정도는 토론 축에도 못 끼는 사례"라고 말한다. 디자인의 중간 단계에서는 휴대폰 액정 화면 안에서 지름이 0.5㎜에 불과한 아이콘 하나 가지고도 밤새도록 '끝장 토론'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업무를 "매일 드라마를 찍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수천,수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정교한 스토리와 논리를 도출해내기 때문이다.


▶▶직급은 모두 연구원ㆍ위계질서ㆍ규율범위 최소한으로 줄인다

이곳에서는 토론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자의 분야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미대 출신의 디자이너는 물론 음악,사회학,인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있다. 대부분이 경력 사원들로 공채 출신은 20%에 불과하다. 내비게이션을 만들다 온 사람도 있고,웹 디자인을 했던 이,커뮤니케이션학 박사와 심리학 전공자까지 있다. 전문성에 대한 인정은 직급 대신 '연구원'이라는 호칭으로 구성원들을 통일시킨 것에서 드러난다. 위계질서를 최소화한 것.

조직이 이렇게 구성된 이유는 디지털 제품 위에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덧입히는 것을 화두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 기능만으로 고객을 사로잡을 수는 없다는 것.이전에는 각종 기능을 펼쳐놓는 방식이었다면 이젠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 추구한다. 커뮤니케이션 전공자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인간과 기계의 소통을 연구한다. 휴대폰 메뉴에 있는 다이어리,전화번호부,메시지함 등에 손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순서의 흐름을 구성한다. 작곡가는 벨소리뿐 아니라 진동 소리,연결음 등 '소리'에 포함시킬 수 있는 모든 음을 디자인한다.


▶▶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수많은 시행착오에 대한 면책권이 있다. 그 예는 '소닉 브랜딩'의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소닉 브랜딩이란 소리만으로 소비자가 어느 제품인지 알도록 하는 일종의 마케팅 기법이다.

대표적인 예가 인텔의 광고에 나오는 사운드 로고와 모토로라의 CF에 나오는 '헬로 모토'라는 소리다. 휴대폰 업계에서는 광고음악뿐 아니라 휴대폰의 전원이 켜질 때와 꺼질 때까지 브랜드를 대표할 수 있는 음을 만들려고 한다. 특히 이 업체는 최근 소닉 브랜딩의 범위 안에 진동 소리까지 포함시켰다. 이 과정을 책임진 윤중삼씨는 페트병,캔을 비롯한 100종이 넘는 소재가 내는 소리와 촉감을 데이터로 만들었다. 휴대폰으로 애완견을 기르는 서비스를 만들 때는 직접 강아지도 키웠다. 강아지의 소리가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아 결국 30가지 소리 중 28개는 성우가 만들었다. 국가별 선호도에 따른 데이터도 작성했다. 휴대폰 안에 첨단 기능들이 추가되면서 생기는 예상치 못한 오작동을 잡기 위한 노력도 상상 이상이다. 3만~4만개의 인위적인 환경을 조성해서 실험,결과물을 데이터로 축적한다. 내부 개발자 500명이 매일 폰을 바꿔 쓰기도 한다.



▶▶ 세상을 놀라게 할 아이디어는 파격적 형식에서 나온다

전문가들의 조직이라고 해서 무미건조한 분위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곳에 입사한 지 3년째 접어든 김승훈씨는 아직도 '정장 사건'으로 회자된다. 캐주얼 복장이 허용되는 이곳에서 한 달이 넘게 정장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명찰까지 달았다. 그는 자신의 비전을 묻는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조직의 미래가 되는 것"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사무실 분위기도 타 기업과는 사뭇 다르다. 이곳을 총괄하는 장동훈 상무는 사무실 안에서 '뛰는 것'을 제외한 모든 행동을 허용한다. 음악을 틀어도,노래를 불러도,심지어 춤을 춰도 관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직원들의 책상을 한 번만 둘러봐도 각 구성원들의 성격과 취미를 알 수 있다. 로봇을 조립해 책상 위에 두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의자 옆에 스포츠 댄스화를 준비해두고 있는 사람도 있다.

서울 소재 대학의 시각정보디자인과 교수 출신인 장 상무는 이런 분위기를 만든 이유를 "분위기를 딱딱하게 가져갈 경우 팀원들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아서"라고 설명한다.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곳인 만큼 규율의 범위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다만 자신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은 '리더의 평정심'이라고 한다. 수많은 협업으로 굴러가는 조직의 '장(長)'이기 때문에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직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


▶▶ 세계적 신드롬 일으킨 '애플 아이폰'신화 이어간다

취재팀이 찾아간 이 사무실은 서울 서소문에 위치한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UX(User Experience)팀이다. 지난 3월 출시돼 국내외에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햅틱'폰의 디자인을 개발한 곳이기도 하다. 이 제품은 79만원이란 고가에도 9월 들어 누적 판매 50만대를 돌파했다. 6월에 출시된 미국판 햅틱 '인스팅트'는 9월 말 기준 100만대 판매를 넘어섰다. 또 지난달 25일 선보인 '햅틱2'는 국내 출시 3일 만에 예약 구매자만 2000명이 넘었다.

햅틱은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애플의 아이폰과 비교되곤 한다. 아이폰은 풀터치폰의 열풍을 몰고 온 주역이긴 하지만 일부 부유층 고객들만의 향유물이었다. 반면 햅틱은 일반 대중들이 가격 저항선을 뛰어넘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개발을 총괄한 장동훈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상무는 "이전에 삼성전자가 개발했던 휴대폰은 편리한 기능이 많았지만 그 사용법을 공부해야 하는 논리적인 제품이었다면,햅틱은 별다른 설명 없이 직관적으로 제품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노력의 결실"이라며 "앞으로 휴대폰 업계는 사용자들이 얼마나 편리하게 제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지에 초점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글=박신영 기자/사진=김병언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