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의 '금융시장 접수 작전'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모기지 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을 국유화하고 보험사인 AIG에 850억달러를 투입키로 한 데 이어 7000억달러의 공적자금을 들여 투자은행(IB) 등이 갖고 있는 부실자산을 직접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정부의 이 같은 시장개입으로 미국식 금융 자본주의는 끝났다는 말까지 나온다.

CDS(신용부도스와프) CDO(자산담보부증권) ELF(주가연계펀드)와 같은 파생상품들이 위기를 초래한 주범이기 때문에 아예 발붙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논리를 들이대자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금융 상품들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들이다. 화폐부터가 사악한 존재였다. 화학 금속학 물리학에 심취한 고대의 대가들은 연금술(鍊金術)에 빠졌다. 근대와 현대의 국가지도자들은 돈을 찍어내는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위폐는 지금도 전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기업어음 역시 지탄의 대상이었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자기자본이 1만파운드도 안되는 회사가 무려 90만파운드의 어음을 유통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음 연쇄 부도로 수많은 기업들이 쓰러진 런던에서는 고난의 1860년대를 보내야 했다.

주식시장은 언제나 탐욕스러운 사기꾼들의 놀이터다. '세계 3대 버블'의 하나로 꼽히는 영국 남해(South Sea)주식회사 사건에 휘말려든 아이작 뉴턴은 당시 2만파운드라는 거액을 잃고 나서 "천체의 운동을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남해 버블로 인해 영국은 1720년 거품규제법까지 만들어야 했다.

광기의 시절에는 금융이 '공짜'로 보인다.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 돈을 찍어내고,어음을 써 주고,주식을 발행하는 비용이란 종이값과 잉크값뿐이다. 13억달러나 되는 채권을 지급보증하는 계약서를 써준 대가로 2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며 거액의 성과급을 챙기는 도덕적 해이가 횡행하고,친구가 부자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동료들의 판단력도 갈수록 흐려진다. 거대한 버블을 만들어가다 결국 터뜨리고,잔뜩 움츠렸다가 다시 버블을 키우는 금융 위기는 너무나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금융시장을 탐욕과 광기의 수렁에서 건져내야 한다는 정치사회적 압력은 금융위기 때마다 등장한다. 하지만 금융에서 위험과 투기의 요인들을 다 잘라내고 나면 역동성도 사라진다. 실물에서 '파생'한 금융은 천재들의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사기꾼들의 도박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화해나가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금융회사들을 대거 국유화하면서도 금융 상품에는 일절 손대지 않는 이유다. 그래서 미국은 앞으로 10년 뒤 또다른 종류의 금융 위기에 빠져들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세계 제일의 금융 경쟁력을 계속 유지해나갈 것 또한 분명해 보인다.

이명박 정부의 금융규제 완화는 예정대로 시행돼야 한다. 자본시장통합법도 그대로 가야 한다. 실물과 사기(詐欺)의 경계선상에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금융시장의 탐욕과 광기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감독당국의 숙명이다. 이게 무서워 처음부터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겠다면 우리는 금융 후진국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승윤 경제부 차장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