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플라톤의 <국가>에는 가장 바람직한 정체(政體)로 ‘아리스토크라티아’가 거론된다. ‘귀족’을 뜻하는 영어 단어 ‘aristocracy’의 영향으로 아리스토크라티아를 ‘귀족정’으로 옮긴 탓에 원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원래는 ‘최선자들의 지배’(the rule of the best)라는 의미다. ‘좋다’라는 뜻의 희랍어 ‘아가토스’의 최상급 표현 ‘아리스토스’와 ‘지배하다’는 의미를 지닌 ‘크라테인’의 합성어다. 혈통은 물론 능력과 품성에서 최고의 리더가 이끄는 것을 최선의 정치 체제로 봤던 것이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크라티아가 타락하면 순차적으로 과두정(올리가르키아), 민주정(데모크라티아), 참주정(티라니스)의 형태를 취한다고 봤다. 사치품 같은 불필요한 것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가 거세지고, 이런 요구를 다루는 정부 기능이 비대해지면서 ‘훌륭한 나라’(아가테폴리스), ‘아름다운 나라’(칼리폴리스)는 고름이 부풀어 오른 듯한 ‘염증 같은 나라’(플레그마이누사폴리스)로 전락한다. 플라톤에게 정치 퇴화의 종착역인 참주정은 ‘말기적 질병’으로 불렸다. 현대적인 언어로 재해석하자면 포퓰리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저열한 정치 체제가 힘을 얻는다고 본 것이다. 서구 정치학의 첫 장을 차지한 것은 ‘정치의 타락’에 대한 경고였다.
[토요칼럼] 염증 같은 나라!…플라톤의 저주 피하려면
가장 훌륭한 자가 국가를 이끌 것인가, 아니면 다수가 사회의 방향을 결정할 것인가는 정치 철학의 영원한 난제였다. ‘가장 뛰어난 자’(호이 아리스토이)의 리더십으로 대변되는 스파르타, ‘군중’(호이 폴로이)의 민의(民意)를 앞세운 아테네는 각각 오늘날 소수 엘리트주의와 대중 민주주의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현대 서구 국가에서도 외교·안보·산업 정책 등 중요 사안은 엘리트들이 결정한다. 국정을 온전히 다수에게 맡기는 체제는 없다. 평범한 사람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모차르트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듯이 국정은 범인의 집합으론 해결될 수 없는, 넓은 시야와 냉철한 판단력이 요구되는 분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정치 엘리트의 움직임은 이상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새 멤버를 꾸려 오는 30일 개원하는 22대 국회도 다르지 않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출범 전부터 곳곳에서 ‘파열음’이 불거지고 있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17개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독식하겠다는 태세다. 관례상 원내 2당 몫이던 법사위원장은 물론 대통령실을 피감기관으로 둔 운영위원장마저 모두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조국혁신당은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변경하자며 “윤석열 대통령부터 임기를 단축하라”고 요구했다. 전자는 ‘제 잇속만 챙기겠다’는 탐욕을, 후자는 ‘사적인 원한을 풀겠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 와중에 집권당이라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제 살길 찾기만 급급하다.

정가에선 한 사람당 25만원씩 나눠주자는 포퓰리즘적 목소리만 드높고 연금 개혁, 획일적 최저임금제도 개선 같은 국가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칠 중요한 사안에 대한 논의는 뒷전이다. 국회의원들이 왜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선량(選良)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다.

플라톤식 타락한 정치의 표본인 양 오늘날 한국 정치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근원에는 민주주의라는 결실만 선물처럼 ‘주어진’ 역사도 한몫한 듯싶다. 한국은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1948년 5·10선거 때부터 신분과 남녀 차별을 철폐해 동등한 투표권을 보장했다. 반면 서구에선 투표권이 처음부터 당연한 권리가 아니었다. 정착하기까지 100년 넘게 걸렸다. 유럽에서 정치 혁명의 바람이 지나간 1910년에도 성인 중 투표권자 비율은 영국 18%, 독일 21%, 프랑스 29%에 불과했다. 보유 재산 규모와 관계없이 일반투표권이 부여된 것도, 비밀투표가 도입된 것도,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도 모두 오랜 시간과 지난한 논의가 필요했다. 이런 과정을 건너뛴 한국의 정치인들은 민주 정체를 치열하게 공부하지도, 소중히 다루지도 않았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철인 정치’가 시행되지 않는다면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고 단언했다. 토양이 척박하고 뿌리가 얕은 한국 정치는 대중영합주의에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끊임없이 경계하고 고쳐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염증 같은 나라’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