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은행의 상황이 안 좋아서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는 여유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거꾸로 속이 타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이 은행의 예금자들이다.

어느 날 한 예금자가 은행(bank)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하면(run) 다른 예금자들도 우르르 같이 뛰어가기 시작한다.

예금 인출을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어떤 은행도 모든 예금자의 예금을 동시에 다 지급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자금이 대출로 나가 있고 대출은 회수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결국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몰려 와서 예금 인출을 요구하면 은행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은행은 파산(bankrun)하고 예금보험공사가 빚잔치에 나선다.

예금자들은 이제 말한다.

"소문이 맞았군."

이를 조금 더 살펴보자.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경제주체들은 이 은행이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하게 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이 '예상'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행동을 유발하는 힘이다.

즉 이 '예상'은 경제주체가 한꺼번에 움직이도록 하는 떼거리 행동(herding behavior)을 유발함으로써 은행이 망하게 할 정도로 힘이 센 예상이다.

이러한 종류의 예상을 전문용어로 자기실현적 기대(self-fulfilling expectations)라 한다.

그런데 만의 하나 이 예상이 옳지 않았다면 어떨까.

객관적으로 볼 경우 이 은행이 망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가정해 보자는 얘기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현실은 비참하다.

실제 망할 정도는 아니었더라도 현실과는 상관없이 이 은행은 파산해 버린다.

따라서 이 경우 사후적으로 이 예상은 항상 맞았다고 평가된다.

이 은행은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 반응(irrevocable process)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보자.여러 해 전 한 제약회사는 흑자를 내며 영업을 잘 하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현금이 부족해지자 영업사원들로 하여금 외상매출금을 회수하도록 독려한 일이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다.

일부 영업사원들이 고객들에게 가서 회사 상황이 어려워질 것 같으니 외상매출금을 갚아 달라고 과장된 발언을 한 것이다.

소문이 증폭되면서 여의도 증권가에까지 퍼지자 이 소문을 접한 펀드매니저들은 해당 회사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고 주가는 폭락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 회사에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대출금 회수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회사는 부도를 냈다.

일부 영업사원이 얘기한 대로 회사 상황이 어려워진 것이다.

잘못된 예상인데도 그 예상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상황이 치달은 것이다.

한국경제의 상황이 어려워지던 1997년 10월 블룸버그 통신이 충격적인 기사를 보도했다.

한국의 외환보유액 통계가 거짓이라는 것이었다.

300억달러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반 정도라는 것이었다.

국제금융시장이 술렁였고 주가는 폭락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국에 대해 우려를 하던 일본계 은행들이 한국 금융기관에 대출해준 80억달러를 인출해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하던 달러가 일본계 은행의 움직임으로 인해 더욱 부족해졌고,곧 이어 11월께 유럽계 은행들마저 대출금의 조기 상환을 요구하면서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의 나락으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대선 국면에서 대응마저 더디어지면서 우리 경제는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를 겪게 되었다.

블룸버그 통신의 보도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원래 외환보유액은 당장 동원 가능한 예금이나 단기 채권으로 보유해야 하는데 한은은 당시 외환보유액이 많다고 보고 일부를 국내 은행 해외 지점에 예탁해 운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예탁받은 은행들은 대부분 대출로 운용하였으므로 당장 회수하기가 힘들어진다.

따라서 이는 외환보유액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반론도 가능하다.

이렇게 예탁한 부분은 시일이 걸리기는 하지만 회수는 가능한 것이고 분명히 한국은행의 자산이므로 외환보유액이 아니라고 단정짓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러한 변명은 별 소용이 없었다.

주식을 팔아치우고 자금 회수 요구가 들어오면서 외국 자본은 한국을 떠나고 주가는 폭락하고 실제로 외환은 부족해졌다.

소문과 뉴스는 사실이 되고 변명의 여지는 사라졌다.

한국경제의 외환위기 과정을 보면 자기실현적 예상의 메커니즘이 그대로 관찰된다.

이것이 바로 '날벼락론'이 주장하는 외환위기의 원인이다.

금융시장은 이처럼 불안하다.

작은 뉴스가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언론의 경제적 역할은 막중하다.

언론은 특히 자기실현적 예상이 생성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경제 관련 보도는 '쿨'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방향을 맞추고 추측하는 것보다는 보다 정확한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며 정부도 이와 관련해 정확한 보도가 이루어지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야 한다.

/서울시립대 교수 chyun@uo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