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회의가 있을 때마다 반(反)세계화 시위가 약방의 감초가 된 지 꽤 오래다. 제12차 아시아ㆍ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부산도 예외는 아니다. APEC 개막 3일째인 14일 부산역 광장에 'APEC 반대ㆍ부시 반대 10만 조직화를 위한 전국 순례단'이 입성했다. 이들은 이미 부산 시내 3000여곳에 집회신고를 해놓은 상태라고 한다. 반(反) 세계화는 무역장벽이 낮아지고 투자가 느는 과정에서 빚어진 국가 간 양극화에 대한 반발을 뜻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서울에 주재하는 외신 지국장들에게 APEC 의제를 설명하면서 "무역 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할 수록 사회적 격차는 더 벌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시장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정서를 함유했을 게다. 21개 APEC 회원국 간 빈부 격차를 보면 노 대통령의 지적을 좌파 동조적 편협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몰아붙일 일만도 아니다.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GDP)은 3만7841달러(2003년 기준)인데 반해 베트남은 468달러에 불과하다. 이런 차이를 뛰어넘어 완전한 무역 자유화를 꾀하자는 건 체급 없이 권투시합을 하자는 것과 같다. 회원국 간 불균형 성장의 우려가 제기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조차 2001년 10월 카타르 도하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를 앞두고 "세계화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려면 개발도상국과 소비자를 배려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꼬아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특별히 이상할 게 없는 노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워싱턴포스트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세계화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불평을 듣게 됐다"고 비꼰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한ㆍ미동맹에 흠집을 냈다는 비판을 받곤 있어도 노 대통령이 무역자유화의 흐름을 거스를 정도로 무모하진 않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언사가 혼란을 일으킬 때가 잦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말꼬리 잡는 외국 언론만을 탓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미국의 눈에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분배 중심의 정책을 국제 무대에서 확대재생산하려는 것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국내에서든 국제사회에서든 성장과 개방 외에 양극화 문제를 풀 방법은 없다. '분배'와 '반세계화'는 명분은 그럴 듯해 보여도 세계 조류와 동떨어져 있는 논리다. 폐쇄성은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저해한다. '격차 해소'를 그렇지 않아도 정체성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APEC 정상회의의 의제로 삼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얘기다. 차라리 무역자유화의 효과를 강조하면서 저개발국에 대한 투자 및 기술 지원 확대를 제안하는 게 부산 APEC 의장국으로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훨씬 유용하다. 그래야 저소득 국가의 개방에 따른 두려움을 없앨 수 있고 APEC 존립근거를 세계에 확인시켜 줄 수 있다. 이익원 경제부 차장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