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5월에 출범한 이후 거의 4개월만에 5일 5.18 민주화운동 등 조사대상을 선정했다. 과거사위는 우선 1차 조사대상으로 12.12 쿠데타와 5.17 비상계엄 확대, 5.18 민주화운동에 이르는 신군부 집권과정과 이후 신군부가 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행한 삼청교육대 사건, 강제징집 등 녹화사업 사건을 비롯, 1960년말에 발생한 북파공작 부대 실미도 사건을 선정했다. 과거사위는 또 1차 조사대상 사건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역시 신군부 집권 과정에서 발생한 `10.27 법난' 사건과 언론인 해직 및 언론통폐합 사건, 5.6공화국의 민간인 사찰사건, 재일동포 및 일본 관련 조작간첩 의혹사건 등을 추가로 조사키로 했다. 민간위원 7명과 국방부측 인사 5명 등 총 12명으로 구성된 과거사위는 8월1일부로 민.군 조사관 10명씩을 임명하는 등 본격적인 조사를 위한 기초작업을 해왔다. 과거사위의 본격적인 조사로 그동안 숱한 진상규명 노력에도 불구, 의혹이 풀리지 않았던 사건들에 진실 규명이 기대되고 있다. 윤광웅(尹光雄) 국방장관의 진실규명 의지가 확고한데다 군 과거사와 관련해 상당한 자료를 축적하고 있는 기무사도 자료 공개 등 적극적 지원 입장을 밝히고 있어 조사 결과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편이다. 국방부는 재야운동 출신의 이해동 목사를 선임하고 민.관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과거사위 조사가 끝난 이후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법적인 조사권한이 없는 과거사위가 관련자들의 자발적인 진술과 자료 등을 통해 얼마 만큼의 성과를 거둘수 있을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음은 과거사위의 진상규명 대상 사건들의 개요와 쟁점 등을 정리했다. ◇ 12.12 쿠데타, 5.17 비상계엄확대, 5.18 민주화운동 = 신군부가 권력찬탈을 위해 12.12 쿠데타에 이어 5.17 비상계엄확대, 이로 인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 등에 대한 조사가 이뤄진다.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의 추를 잡은 신군부는 1980년대 초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북한의 남침우려 등을 퍼뜨리며 5월17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신군부는 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민주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투옥을 자행했고 18일부터 본격화된 광주 지역의 민주화 시위를 공수부대를 동원, 무자비한 진압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5.18 기념재단 등에 따르면 5.18 유공자로 등록된 피해자만 사망자가 207명, 부상 2천300여명을 포함해 총 3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동인 집요한 진상규명 요구에 힘입어 1988년 국회 청문회 등을 통해 큰 틀에서의 사건 진상규명에 이뤄지고 보상 등을 통한 명예회복도 이뤄졌다. 그러나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께 이뤄진 것으로 알려진 첫 발포 명령이 누구에 의해 어떤 계통으로 이뤄졌는지, 정확한 행방불명자 수, 당시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행태 등에 대한 구체적 진실은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있다. 과거사위는 12.12 및 5.18 관련자 훈.포장 내역과 5.17 계엄확대 이유,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집단발포 명령 체계 및 행방불명자 행방 등에 대한 조사를 집중적으로 벌인다. 훈.포장 내역에 대한 조사를 통해 불이익을 받은 피해자에 대해서는 명예회복 등 방안을, 훈.포장 치탈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서는 치탈을 권고할 예정이다. 과거사위는 또 5.17 계엄확대 조치를 취한 조치가 북한의 남침우려에 따른 것이라는 신군부의 설명과는 달리 신군부의 집권 공고화를 위한 조치였다는 의혹을 두고 있다. 집단발포 명령 경위와 관련, 그동안 신군부 인사들은 정당방위 차원에서 발포가 이뤄졌다고 밝혀왔지만 발포 직전 진압군 대위 1명이 통신병에게 계속 발포 명령이 어떻게 됐는 지를 물으며 다그쳤고 10분뒤에 발포가 이뤄졌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 삼청교육대 사건 = 삼청교육대 사건은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가 사회풍토 문란사범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자행한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건이다.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이 발령된 직후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군부대 내에 이른 바 삼청교육대를 설치했다. 신군부는 이어 1980년 8월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를 발포하여 죄질에 따른 순화교육, 근로봉사, 군사재판 등을 병행, 사회악 소탕을 선언했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1981년 1월까지 총 6만여명이 체포돼 당시 보안사, 중앙정보부, 헌병대, 검찰.경찰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이들을 A, B, C, D 등 총 4등급으로 분류했다. 이 중 A급 3천여명은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B, C 등급 3만9천여명은 4주간의 교육과 6개월간의 복역, 이후 2주간의 추가 교육을 통해 훈방했으며 D급 1만7천여명은 경찰에서 훈방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법체포와 구금, 강제노역, 구타, 살인 등 극심한 인권유린 행위가 자행됐고 이로 인한 사망자가 50여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가 수 백명에 이르고 정신적 장애 등의 피해를 입은 사람만 2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과거사위는 삼청교육 계획 입안 및 추진과정의 위법성과 피해자들에 대한 검거과정 및 교육과정에서의 인권유린 실태, 검거자 및 군 입소자, 사망자 등의 정확한수 등에 조사를 집중할 방침이다. ◇ 실미도사건 = 영화 '실미도' 상영을 계기로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됐다. 1971년 8월23일 인천 용유도에 딸린 무인도인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실미도 부대원들이 자신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해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진입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사건이다. 실미도부대(공군 684부대)는 19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한 1.21사태의 보복 차원에서 평양의 김일성 주석궁 보복 습격을 목표로 31명의 특수임무 요원으로 창설됐다. 정식 부대명칭은 '공군 2325전대 209파견대'로 실제로 군에서는 실미도부대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대원들은 실전과 동일한 북파 훈련과 철저한 인민군식 훈련을 받으며 단 3개월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개조됐다. 그러나 3년4개월 동안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다가 1970년대초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북파 임무가 취소됐으며 이들의 존재가 외부에 공개될 것을 우려한 정부는 기간병들에게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기간병 24명 가운데 18명이 북파부대원들에 의해 희생당하고 6명만이 살 아 남았다. 훈련 중 사망한 7명을 제외한 부대원 24명은 인천에서 버스를 빼앗아 서 울로 향하다가 총격전 끝에 수류탄을 터뜨려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 생존자 4명도 1972년 3월 사형당했으며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 로 규정했고 30여년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실미도부대에 정통한 예비역 공군장교는 지난 해 2월 연합뉴스 회견에서 사형이 집행된 요원은 임성빈(충북 청주) 김종철(대전) 이석천(인천) 김창구(충북 옥천)씨 등 4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초병 살해죄와 살인죄, 방화죄 등의 혐의가 적용된 것으로 알려진 4명의 사형수를 비롯한 부대원들의 신분은 철저히 은폐됐고 '사형수' 등으로 왜곡 전파됐다. 그러나 정래혁 국방장관은 사건 발생 다음 날인 1971년 8월24일 국회에 출석해 발언한 내용을 정리한 속기록에는 684부대원 전원이 민간인 신분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국방부도 작년부터 가동한 '실미도진상조사TF'를 통해 전과기록이 있는 부대원은 4명에 불과하고 부대원 모두 평범한 시민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사형수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된 것이 적법했는 지 여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과거사위는 684 부대의 창설 배경 및 주체, 훈련병 모집 및 훈련 과정에서으 탈법, 불법적 인권유린 실태, 훈련병의 신원확인및 유해 발굴 등에 조사를 집중할 예정이다. 그러나 부대원들이 입대하면서 작성한 신원진술서 등 관련자료가 대부분 폐기돼 당시 지휘관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베일에 가려진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날 지는 의문이다. ◇ 학원녹화사업 =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1983년 사이에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 징집해 '특별정훈교육'을 시켜 '불온사상'을 순화(녹화)한다는 명분으로 실시됐다. 이 과정에서 강압적인 사상 개조와 학생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불법연행과 수사 가 자행됐고 엄청난 육체ㆍ정신적 가혹행위가 가해졌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으나 아직까지 전모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1988년 5공 청문회와 2001년 활동을 시작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이르 기까지 녹화사업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작업은 간헐적으로 진행됐으나 정작 누가 이 계획을 주도했는 지는 미궁에 빠져있다. 녹화사업은 학생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을 조기에 입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정부 가 1981년 12월5일 발표한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를 통해 사실상 본격화됐다. 군에 강제징집된 학생 수는 대략 1천100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군이 자료를 공 개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81년 11월부터 1983년 11월 사이에 447명이 강제징집됐고 1982년 9월부터 녹화사업이 외형상 중단된 1984년 11월까지 모두 256명이 특별정훈교육을 받은 것으로 조사된 적이 있다. 의문사위는 최근 1983년 실탄을 맞고 숨진 것으로 알려진 서울대생 한희철씨(당 시 22세)는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자행된 구타 및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자살한 것 으로 발표했다. 정부는 잇따른 군내 의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1984년 소 요 관련 대학생 조기입영제를 폐지하고 녹색사업의 전담부서인 보안사의 3처5과를 해 체했다고 발표했으나 1990년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에 비춰 운동권 출신자를 이용 한 프락치 공작은 그 이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사위는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 과정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여부,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 대상자 수, 프락치 공작실태 및 피해 사례 등에 대한 조사를 벌인다. 국군기무사는 전신인 보안사에서 자행한 녹화사업과 관련한 자료를 상당부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군 과거사위 관계자는 전했다.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이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