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사람들이 "복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라는 축복과 덕담으로 새해를 여는 것은 '희망의 씨'를 키워보려는 다짐일 게다. "새해에는 민생과 경제에 올인하겠다" "기업이 국가다"라는 간단한 메시지만으로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10%포인트 이상 뛰어올랐다니 국민들이 희망에 얼마나 목매어 있는지 짐작케 한다. 하지만 씨를 뿌린다고 해서 희망의 열매가 저절로 맺히는 것은 아니다. 씨를 내리는 곳이 어떤 토양이냐가 더 중요하다. 경제가 되살아나고,그래서 민생이 숨통을 틀 수 있게 하려면 가계와 기업이 마음껏 소비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일이 전제돼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경제의 무엇이 잘못돼 있는지,우리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시장'은 올바로 작동되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시장이란 무엇인가. 가계와 기업이 생산된 재화를 공급하고 소비하면서 각자의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곳이 곧 시장이다. 경제학에서는 시장을 움직이는 힘을 '이기심'으로 본다. 애덤 스미스가 설파한 대로 "우리가 아침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것은 빵집과 푸줏간,양조장 주인의 자비심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덕분"이다. 그 이기심이 넘쳐나도 가격결정 메커니즘과 같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기 때문에 경제활동 의욕이 극단으로 흐를 우려는 없다고 스미스는 강조했다. 물론 시장 시스템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자본을 충분히 축적한 가계나 기업이 출발점에서부터 우위에 서기 때문에 불평등 문제가 생길 수 있고,특정집단의 이익추구를 위한 행위가 다른 참가자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외부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시장거래의 이같은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정부 등 공공부문의 역할이고,공정한 경쟁을 담보할 '시장규칙'이다. 문제는 이런 보완장치가 '보완'을 넘어 시장제도의 틀 자체를 넘보고,시장참가자들의 경제활동 의욕을 꺾는 데까지 확장되는 경우다. 국가권력의 개입으로 결과적 형평과 분배정의를 이뤄보려는 온갖 시도는 옛 소련권의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과 서유럽 국가들의 복지지상주의 실험에서 '설계주의적 환상'에 불과했음이 이미 충분하게 입증됐다. 철 지난 국가간섭주의 모델을 움켜잡고서 시장을 뜯어고쳐 '분배정의'를 이루고 기업을 개조하겠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서는 '기업이 국가'이고 '민생에 올인'하겠다고 한들 경제가 되살아날 가망성은 없어보인다. 과도한 부동산 규제와 출자총액제한,이중삼중 규제의 전형인 집단소송법 등은 제아무리 '개혁'이란 수식어를 붙여봤자 중앙권력집단에 의한 설계주의요,시장왜곡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부동산시장 '안정'조치는 내집 마련을 위해 전세금을 빼내려는 서민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모순을 초래했다. 대기업 출자를 일정 수준에서 묶어 그보다 작은 기업들의 활동공간을 넓혀주겠다는 '공정'거래법은 44조원의 기업 현금자금을 금고 속에 묶어놓았다. 그 결과 시장은 맥을 잃고,대부분 거래는 숨을 죽이게 됐다. 설계주의적 의욕과잉의 위험천만함을 새삼 거론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과연 무엇이 희망을 잉태하며 그 희망을 싹트게 하는 것인지 더 늦기 전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그 답은 가계와 기업에 공정한 게임룰에 바탕한 경제활동의 공간을 마음껏 보장하는 자유 시장경제인가,소수의 권력엘리트집단에 의한 또 한번의 유토피아적 경제설계 실험인가. 이학영 경제부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