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2일 발표한 삼성 현대 등 6대 그룹의 사외이사 현황은 '기업의 투명성 제고'라는 본래의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해졌음을 단정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사외이사 자리가 관료 출신이나 관변 학자, 그리고 대주주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전직 계열사 임원 등에 의해 점령됐기 때문이다. 사외이사 제도가 국내에 도입된지 5년이 지났지만 이 제도의 의무화는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빚어낸 규제의 결과물"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시민단체나 소액주주 등은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감독이란 명분만 살아있는 제도"라며 대대적인 제도 보완을 요구하고 있다. ◆ 퇴직관료ㆍ대학교수 주류 올 3월 말 현재 삼성 현대 SK LG 현대차 현대중공업 등 6대 그룹 54개 계열사에서 활동하는 1백63명의 사외이사중 절반에 가까운 76명이 전직 공무원 등 정부관련 인사였다. 특히 전체의 20%에 해당하는 33명은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원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 기업활동에 대한 규제업무를 맡는 정부부처 출신이다. 사외이사라는 자리가 대정부 로비 창구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히 삼성그룹은 황재성 국세심판원 심판관(전 서울지방국세청장), 박석환 전 중부지방국세청장, 신석정 전 국세청 조사국장 등 세무 고위 관료 출신을 대거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교수이면서 정부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각종 위원회의 현직 위원들도 다수 사외이사로 활동 중이다. 조동성 금감위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위원(기아자동차) 김일섭 재경부 금융심사소위원회 위원(LG카드) 이만우 예금보험공사 운용위원(LG카드 현대엘리베이터) 등이 이에 해당된다. 구자정 ㈜LG 사외이사와 박윤식 삼성물산 사외이사 등 7명은 그룹 계열사의 임원 출신이다. 이들은 대주주의 영향에서 벗어나 중립적인 시각에서 경영감시 활동을 펼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 개선방향은 엇갈려 사외이사 제도가 퇴직 관료 및 전직 임원의 자리마련용으로 변질됐고 상당수 사외이사들은 경영진에 대한 견제역할에 제한적이라는 문제점에는 재계나 시민단체가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개선방향에 대한 입장은 엇갈리고 있다. 이의영 경실련 재벌개혁위원회 위원장(군산대 경제학과 교수)은 "소액주주의 이해를 반영하는 이사 후보 추천이 제도상 결함으로 봉쇄되고 있고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도 대주주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라며 "이사회 절차와는 별도로 소액주주들이 이사 후보를 추천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재계는 사외이사 선임문제는 전적으로 기업의 자유의사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제도가 대주주의 전횡을 막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경영상 의사결정 지연과 도전적인 투자 곤란, 중요한 정보의 외부 유출 가능성 등 부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란 것. 박양균 자유기업원 선임연구원은 "사외이사 제도의 원조격인 미국에서도 사외이사는 일반적인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고 위기상황에서만 역할을 한다"며 "인재풀(pool)이 제한적인 한국에서 획일적인 사외이사 의무화는 퇴직 관료 및 관변학자의 부업을 양산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 [ 사외이사 제도란 ] 사외이사 제도는 외환위기 직후 대주주의 경영 독단을 견제, 기업 투명성을 높이고 소액주주 이익을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지난 98년 2월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일환으로 유가증권 상장규정에서 전체 등기이사중 4분의 1을 사외이사로 선임할 것을 의무화하고 사외이사 미선임 법인이나 미달 법인에 대해 관리종목으로 지정하도록 했다. 2000년 증권거래법 개정을 통해 상장법인은 전체 등기이사중 4분의 1을 사외이사로 구성할 것을 의무화했다. 박민하 기자 haha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