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 직전 남긴 유서는 구체적인 자살동기를 담고 있지 않지만 대북사업에 대한 강한 애착과 착잡했던 최근 심경의 일단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정 회장은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과 가족들에게 쓴 A4용지 4장 분량의 유서에서 `명예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라고 적어 대북사업에 대한 강한 애착과 미련을 드러냈다. 또 자신의 죽음을 계기로 선친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숙원이었던 대북사업이 중단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염원을 유서에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부인에게 남긴 유서중 `나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주기 바란다'는 구절은 자신이 생전에 본궤도에 올려놓지 못했던 금강산 관광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모습을 저승에서나마 지켜보겠다는 간절한 희망을 내비친 대목으로 해석된다. 정 회장은 또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습니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저를 여러분이 용서해주기 바랍니다'라고 언급, 대북송금 및 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해 세인의 주목을 받은 자신의 과거 행적을 참회하는 심경을 엿보게 했다. 이 대목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생애 말기에 온 힘을 쏟아부은 대북사업을 이어받았지만, 부친 사망 이후 잇단 정치적.법적 공방에 휘말린 것에 대한 자괴감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중 정부 말기 불거진 현대측의 5억달러 대북 송금과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관련성에 대한 특검의 대북송금 수사로 대북사업의 순수성이 의심받고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최근 3차례에 걸쳐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이는 견디기 힘든 심리적 충격도 암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김 사장에게 보내는 유서에서 "명예회장님께서는 당신이 누구보다 진실한 자식이었습니다. 당신이 회장 모실 때 보면 저희 자식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습니다" 등은 김 사장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선친의 유지를 받들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는 대목으로 여겨진다. 대북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한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심경을 김 사장에게 보낸 유서 행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정 회장은 딸에게 보낸 유서에서 '나 때문에 너의 생활이...사랑해'라고 적어 회사와 자신을 둘러싼 파문이 가족들에게까지 미친 것과 관련해 가장으로서 견디기 힘들었던 속내도 내보였다. 이번 유서는 갈겨 쓴 형태로 작성돼 있어 죽음을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이 현대 주변에서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또 대북송금 및 비자금 조성 수사를 진행해온 특검과 검찰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죽음을 계기로 주변과 현대아산을 보호하고, 파문 확산을 차단하려는 배려로 추정된다. 정 회장이 죽음을 앞두고 4장의 유서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자살배경을 언급하지 않아 극단적 선택을 초래한 원인을 놓고 한동안 각종 억측이 난무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연합뉴스) 조재영기자 fusionj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