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영국 런던에서 유학중 행방불명된 고베(神戶)시 출신의 아리모토 게이코(有本惠子.당시 23세)가 북한에 납치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의 조선적십자회(北赤)가 22일 이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적십자와 회담할 용의가 있다고 밝혀 주목되고 있다. 북적 대변인은 담화를 통해 일본에서 제기되는 여성 납치사건과 관련해 "우리는 그를 유혹하거나 납치한 일이 없다"고 밝히면서 "그렇지만 우리는 행방불명자 조사사업을 계속 하기로 하였다"고 강조했다. 북적의 이같은 입장 표명은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북한을 배후로 보는 '납치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에 반발, 일본인 `행방불명자' 조사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한것을 뒤집는 것으로 북일관계 개선을 의식한 조치로 보여진다. 그동안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는 북ㆍ일 수교회담 초기부터 '뜨거운 감자'로 대두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91년 1월 평양에서 북ㆍ일간 첫 수교회담 본회담이 개최됐으나 해 5월 제3차 회담에서 일본측이 제기한 `이은혜'(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일본인 일어선생) 신원확인 문제로 약 3개월간 회담이 지연됐으며, 92년 11월 제8차 회담에서 북한 핵개발의혹과 `이은혜' 문제로 회담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어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황장엽 노동당 비서 망명 등으로 어수선하던 양국관계는 97년 11월 일본의 여3당대표단이 방북, 수교회담의 조속한 개최에 인식을 같이함에 따라 그해 11월과 98년 1월 북송 일본인 처들이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98년 2월들어 일본인 행불자 문제가 외교적 현안으로 등장하면서 양국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일본은 북한측의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촉구했지만 북적 대변인은 98년 6월 발표한 담화를 통해 98년초부터 5개월간에 걸쳐 일본인 행불자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사업을 진행했지만 일본측이 찾고있는 행불자 10명중 1명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후 99년 9월 북ㆍ미 베를린회담이 타결되자 그해 12월 일본 초당파 의원대표단의 방북, 북ㆍ일 적십자사회담과 외무성 국장급 회담 등을 통해 진전을 이뤘다. 특히 2000년 3월에 개최된 북ㆍ일 적십자회담에서는 일본인 납치의혹에 대해 북한측이 `행방불명자'로서 조사하고 소재가 확인되면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 등을 포함한 공동 발표문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2000년 4월에는 7년반만에 수교회담 제9차 본회담이 평양에서 재개됐고, 3차 일본인 처 고향방문에 이어 그해 10월 제11차 본회담이 베이징(北京)에서진행됐으나 `과거사 청산' 등 주요 현안에서 각기 기존 입장을 고수, 차기 회담 날짜도 정하지 못한채 끝나고 말았다. `일본인 납치' 의혹에 대해 북한과 일본은 현격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일본은 지난 77년 11월 당시 13살이던 요코다 메구미양 사건을 비롯해 10여명의 일본인이 북한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북한측의 성실한 조사와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은 일본인 납치의혹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일본 당국이 과거청산을 회피하기 위해 조작해 낸 `정치적 모략극'이라는 태도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00년 2월 "일본이 납치의혹을 들고 나오는 것은 올바른 과거청산을 방해하며 두 나라 사이의 관계정상화에 제동을 걸어 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북한은 `납치의혹'이 아니라 단순한 `행방불명자'로 규정, 북적을 통해 조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동안 조사한 결과 행불자가 단 한명도 없다는 게 공식입장이다. 북적은 지난해 12월 `행불자' 조사중단을 선언하면서도 북한의 해당기관과 협조아래 일본이 의뢰한 행불자 조사를 성의껏 실시했다면서 "이 과정에 일본측이 말하는 행방불명자란 우리 공화국 경내에는 없다는 것이 판명됐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번 북적의 `행불자' 조사사업 재개 의향 표명과 회담 제의가 어떻게 풀려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서울=연합뉴스) 김두환기자 dhk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