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입학 시즌이다. 얼마전 우리대학도 신입생을 맞았다. 대학 전체의 입학식이 끝난 뒤 단과대학별 대학생활 안내가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나는 모교론(母校論)을 피력했다. 요즘 대학 신입생치고 모교라는 말의 각별한 뜻을 알고 있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 해서였다. 나는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로서 이 학교는 여러분의 모교가 됐습니다. 학교에 어머니 모(母)자를 붙이는 것은 그 만큼 인연이 깊고 강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세상에 다른 어디에 대고 감히 이 어머니 모(母)자를 붙일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수십년 재직하고 떠나시는 교수님 한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퇴임하기 전 평소 가르치던 텅빈 실기실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더라는 것입니다. 그 기름냄새까지도 향기롭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수와 교수,교수와 학생으로 만나 대학에서 평생 나누었던 인연의 소중함에 대해 새삼 절절하게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평소 대학에 대해서,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지냈던 인연들에 대해 무심했었는데,정작 대학을 떠나려 하니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었는지를 깨닫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그런 깨달음이 이렇게 늦게 오는 지 모르겠다고 씁쓰름하게 웃으셨습니다. 또 연전에는 유럽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백발의 노신사 한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 살고 있다는 그 분은 외국생활을 수십년 했지만 인생의 가장 설레는 추억들은 모두 서울대미대 시절에 있다고 회상했습니다. 남몰래 평생 재직하던 미술대 벽돌을 쓰다듬으며 문을 나섰다는 노 교수님이나,몸은 외국에서 생활해 왔지만 마음은 서울대미대 언저리를 맴돈다는 연세 드신 동문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이 몸담게 될 대학은 그토록 소중한 곳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판에 박힌 축하인사에 앞서 감히 여러분에게 강하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인연을 갖게 될 여러분의 모교에 대해 높은 자존감과 각별한 애정을 가져달라는 것입니다. 이 학교는 여러분들의 선배들이 땀과 눈물로 여기까지 키워 온 곳입니다. 때로는 이 곳에서 불의에 대한 함성도 있었고,잘못된 것을 질타하는 외침도 있었습니다. 불가피하게 분열된 아픈 시기도 지나 왔고,국내 최고대학이라는 자만이 지나쳐 위기와 침체 국면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대학이나 대학 구성원들에 대한 불편함과 실망 또한 없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대한 높은 자존감과 자긍심만은 늘 푸르게 나부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챙겨야 할 가장 급한 덕목이 바로 이 서울대미대에 대한 드높은 자부심과 자존감이라고 봅니다. 이것을 상실해 버린다면 대학과 여러분의 관계는 하나로 만나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대학은 결코 여러분들에게 어머니 모(母)자를 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신입생들이야 내가 그날 그렇게도 강조한 모교론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모교'라는 말의 의미 자체는 너무도 애틋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말은 이제 사어(死語)가 돼가고 있다. 대학에 들어가려고 사생결단 애를 쓰는 것은 옛날이나 같지만,막상 입학하고 난 후의 학교에 대한 자긍심이나 애정은 옛날보다 훨씬 엷어진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대학다닐 때만 하더라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던 교복이나 배지를 달고 다니는 학생은 이제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없다. 모든 것이 급속하게 사라져 버리는 시대이지만,대학 교복과 배지와 함께 사라져 버린 '모교'라는 낱말이 아쉽기만 하다. 물론 학교의 인연을 강조하다 보면 그것이 폐쇄적 집단의식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지연과 함께 학연을 강조하는 것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요즘 같은 정치의 계절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모교라는 말속에는 단순한 학연의식 이상의 순고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배움의 집에 대한 옷깃을 여미는 겸허함과,존중의 마음이 그 말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그래서 입시에 지쳐 무표정한 얼굴로 대학문을 들어서는 신입생들에게 오늘 나는 다른 무슨 말보다 먼저 '모교'라는 박제된 말 하나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kimbyu@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