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남아돈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지만 연속되는 풍년으로 쌀 공급량이 넘쳐 재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나라 전체의 고민이 됐다. 여기에 세계무역기구(WTO) 뉴라운드 협상의 출범과 중국의 WTO 가입으로 쌀 개방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예상돼 국내 농가는 이래저래 불안에 싸여 있다. 위기의 쌀 산업 =가장 심각한 문제는 깊어가는 쌀의 수급 불균형. 그간 생산기반 투자와 기술진보에 힘입어 생산성이 향상돼 쌀 공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반면 쌀 소비는 식생활방식의 서구화와 아침을 거르는 인구 증가 등으로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1996년 24만t(1백68만섬)에 불과하던 민간 및 정부 재고를 합친 쌀 재고량은 2000년 1백5만t(7백35만섬), 2001년에는 1백40만t(9백89만섬)으로 늘어났다. 쌀 재고율(소비량을 재고량으로 나눈 수치에 100을 곱한 것)은 지난해말 28%로 2000년(20%)보다 무려 8%포인트나 올랐다. 여기에 2004년 예정된 WTO 쌀 재협상마저 국내 쌀 산업을 탈진 상태로 몰고 갈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28일 도하 각료회의에서 뉴라운드의 협상 일정과 기한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며 시장 개방의 폭과 방법에 대한 본격적인 협상이 당장 현안으로 떠 오르고 있는 것. 농림부 이근후 국제협력과 사무관은 "농산물에 대한 일반적인 관세 감축 폭이 결정될 경우 2004년 쌀 재협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더 이상 쌀 수입 개방을 외면할 수는 없게 됐다는 이야기다. 관세화 허용해야 하나 =뉴라운드에 대비해 정부가 취할 수 있는 협상 전략은 크게 두가지다. 최근까지 미뤄 왔던 관세화를 풀든지 아니면 일정 기간 추가적으로 관세화 유예를 연장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문제는 관세화 원칙을 수용할 경우 국내외 가격차의 90% 수준으로 관세율을 당장 적용해야 한다. 기준 시점에 대해 협상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현재 국내 쌀과 중국산 쌀의 가격차가 무려 6.3배에 달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며 국내 쌀 시장이 외국산 쌀에 의해 붕괴되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는게 농민들과 농업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관세화 유예쪽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앞날을 낙관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의무적으로 도입해야 하는 최소시장접근물량(MMA)이 2004년 4%보다 커질 것이 불가피해 이로 인한 재고부담 문제가 악화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쌀 한 품목만을 보호하려다가 전체 농산물 분야에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우려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정부의 협상 전략 =관세화 유예를 최대한 연장시키는데 협상력을 집중한다는게 농림부의 방침이다. 이를 위해 관세화 유예시 MMA가 얼마나 늘어날 것인지와 여타 농산물 시장 개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검토하고 이에 대해 우리나라가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중이다. 농림부 송주호 협력과장은 "관세화 유예를 유지하더라도 쌀 수출국들이 수긍할만큼의 MMA를 제시해야 하는데 여기에 어려움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지난 5년간 수입국간 구축해 온 공조체제를 최대한 활용해 신축성을 확보해 나간다는 입장이다. 이같은 대책의 일환으로 오는 7월에는 제4차 NTC(비교역적기능) 회의를 개최해 동조세력을 끌어모을 계획이다. 또 미국 중국 등 주요 협상대상국과 사전 교섭 채널을 마련해 충분한 공감대를 이룬다는 전략도 갖고 있다. 정부는 협상능력 보강을 위해 이미 농림부내 WTO 농업협상 전담반과 협상 전담 직위를 신설했다. 민.관 뭉쳐 '쌀 개혁' 나섰다 =급변하는 쌀 시장 분위기에 따라 농촌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기존 쌀 증산 전략만으로는 결코 외국산 쌀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자각, 고품질 쌀 개발로 방향을 틀었다. 이를 위해 시.군 등 지자체, 산지 농협과 농민들이 손잡고 고품질 쌀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라남도 곡성군은 곡성농협과 함께 관내 점질토 논 1천2백4ha를 대상으로 일괄 계약재배를 실시, 고품질 쌀을 생산키로 했다. 곡성군은 이를 위해 올해 예산으로 9억6천3백20만원을 확보했다. 또 계약 농가에 기술지도뿐만 아니라 품질향상을 위한 토양기반 조성비 등도 지원할 방침이다. 전남 보성군에 있는 득량농협도 고품질 쌀을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벼 재배력' 2천2백부와 관련 교재를 제작하고 최근 농가에 배부했다. 이 재배력에는 땅심 높이기 우량종자 확보방법 성장시기별 물관리 요령 거름주기 등 고품질 쌀 생산을 위한 벼 재배기술이 그림과 함께 일목요연하게 설명돼 있다. 충청남도 서천의 동서천농협은 올해 개별 농가의 생산과정에 섭씨 3~5도로 저온저장해 3백65일 햅쌀 밧맛을 그대로 유지하는 냉각쌀의 재배 기술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동서천농협은 올 봄 영농에 들어가기 전 서천군농업기술센터와 연계해渦敾濚?농가에 특별 교육을 통해 품종의 특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벼 재배를 유도하는 한편 목초액 엽면시비법 등을 지도할 계획이다. 농협중앙회 여규동 부장은 "농업 종사자들간에 양질미 위주의 품종 개발 및 보급 확대만이 우리 쌀의 품질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이라는데 공감대가 이뤄지며 이같이 민.관이 힘을 합쳐 자발적인 쌀 생산 개혁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