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대통령은 김우중 회장을 징키즈탄에 비유해 "킴키즈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말이야말로 김 회장의 미래를 예견한 말인지도 몰랐다. 유목군단은 어느날 갑자기 역사의 전면을 질풍처럼 내달렸다가 종말에 대한 예고도 없이 너무도 허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기도 했다. 인간 김우중과 그의 군단이 해냈던 유라시아 진군도 같은 운명을 향해 나아갔다. 중국 인도 우즈벡을 거쳐 루마니아와 폴란드로 밀고들어갔던 그의 행군로는 놀랍게도 한때의 몽골제국과 너무도 닮아 있다. ■ 95년 5월 오스트리아 빈 "자, 내가 해결할테니 조건을 말해보세요" 요한 슈트라우스의 도시 빈의 한 호텔. 폴란드 FSO의 안지제이 타이스키에브시즈 사장과 마주 앉은 김 회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고용이 가장 중요합니다. 2만명 전부를 고용해 주길 원합니다. 또 앞으로의 투자에 대해서도 약속해야 합니다" 타이스키에브시즈 사장은 벌써 5년동안이나 GM에 끌려다닌 터였다. '혹시나'하는 심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망설인 끝에 꺼낸 요구.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15분을 넘기지 않았다. "좋습니다. 7년간 11억달러를 투자해 20만대 생산능력을 갖추고 근로자 2만1천명은 3년간 단 한명도 해고하지 않겠습니다"고 김 회장이 잘라 말했다. "어떤 방법으로-?" 타이스키에브시즈 사장의 표정은 반신반의였다. GM도 '인력의 30%만 흡수하고, FSO가 생산할 수 있는 최대규모는 5만대'라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생산량을 4배로 끌어올리면 우리는 2만명의 근로자 모두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대우가 일하는 방법'입니다" 세계 자동차업계의 거인을 무너뜨리고 대우의 폴란드 입성을 확정짓는 순간이었다. GM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이었다. GM으로선 FSO마저 대우에 넘겨줄 경우 동유럽의 공백을 메우기 힘든 상황이었다. 특히 상대는 한때 합작파트너였던 약체 '대우'였다. GM은 곧바로 수정 제안을 냈다. '연간 10만대 생산규모로 하고 고용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독일 오펠의 생산설비 일부도 FSO로 이전하겠다'는 것이 골자. 그러나 폴란드 정부는 이미 GM에 넌더리가 난 상태였다. 8월 마지막날 FSO는 결론을 내렸다. "대우와 FSO, 상용차 생산업체인 FSL과 현지의 한국 협력업체들을 묶어 '뉴코 폴란드'라는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고 2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게 될 것이다" 다음주인 9월 첫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誌)는 '대우가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인 GM의 유럽전략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또 하나의 도요타(New Toyota)가 탄생했다'고 썼다. 대우와 GM은 2년후인 97년 우크라이나의 압토자즈(Auto-Zaz) 인수를 놓고 또다시 맞붙지만 여기서도 대우가 완승을 거두었다. 김 회장은 놀랍게도 "GM이 원한다면 우크라이나에서 대우가 GM차를 대신 생산해 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김 회장은 FSO 인수 이듬해인 96년 3월14일 동유럽에서 한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FSO 인수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자동차 산업은 전체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2만명이나 되는 인력을 떠안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다른 업체들이 FSO 인수를 망설였지만 이는 별 문제가 아니다. 폴란드는 성장하는 시장이기 때문에 생산을 늘리면 인력과잉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 몰락의 단초 "김 회장은 동구권과 중국, 인도시장이 급속히 성장할 것이라고 봤다. 인도와 중국은 성장잠재력에서,동구권은 미국이 경제부흥을 지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영철 전 대우차 기획실장은 회고했다. 또 다른 임원의 증언. "당시 김 회장은 인도와 중국시장은 2000년이면 연간 1천만대 시장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바로 이같은 대예감에 이끌려 김 회장은 말 그대로 칭기즈칸의 진군로를 따라 동유럽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자동차를 앞세우고 전자 중공업 건설 금융을 선단으로 묶은 대우군단의 전진이었다. 우즈베키스탄 중국 인도 루마니아를 거쳐 폴란드에 닿은 것이 바로 95년 8월이었다. ■ 불길한 징조들 신흥시장은 그러나 예상했던 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다. 97,98년 두햇동안 해외공장의 가동률은 고작 30∼40% 맴돌았다. 그렇다고 남아도는 기계와 인력을 무작정 놀릴 수도 없었다. 대우차 사장 출신인 A씨는 "손해를 보면서라도 차를 만들어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밀어내기와 출혈판매는 대우차의 재무상태를 악화시켰다. 불길한 징조는 대우가 심혈을 기울였던 인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출 첫해인 95년. 계약을 받자마자 첫달에만 1만명의 예약자가 몰려들었다. 반신반의했던 대우차 직원들은 '역시 김 회장'이라며 그의 예지력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환희는 그러나 한달을 넘기?못했다. 서울에서 부품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출고가 늦어졌고 품질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대부분 예약이 취소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수십만대 생산규모를 갖춘 인도공장에서 생산한 차량은 고작 1개월에 2천∼3천대 수준에 그쳤다. 이렇게 해외공장은 하나 하나 곪아갔다. ■ "만들어라 그러면 팔릴 것이다" 김 회장은 95년 7월 외교안보연구원 초청 특강에서 "자동차는 하이테크가 아니라 미들테크다. 우리는 이 분야의 경쟁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회장의 자동차 사업에 대한 생각은 처음 사업을 시작했던 와이셔츠 판매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상품보다 마케팅을 중심에 놓고 생각했던 것이다"(대우차 김대호 선임연구원) 한마디로 '대우차는 만들어라. 그러면 ㈜대우가 팔 것'이었다. 당시 해외사업을 담당했던 한 임원은 "국내외 사정을 고려해 생산계획을 잡아 보고하면 영락없이 불벼락을 맞았다"고 전했다. 김 회장은 "생산량을 최대한 늘려라. 그 다음은 내가 팔 것"이라고 지시하곤 했다. [ 특별취재팀 =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