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가지 무늬' 인류문명 엿보기..'문명은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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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종은 안을 쳐서 밖으로 알리고 동양 종은 밖을 쳐서 안을 울린다"
문명비평가 권삼윤씨가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생각하는 동서양 문명의 차이.
20년간 60개국을 누비며 인류문명의 유전자 지도를 만들고 있는 그는 서양식 종과 우리나라의 종을 "안과 밖""여운과 소리"의 리듬으로 비교한다.
갈릴레오가 낙하실험을 했던 피사의 사탑도 원래는 종탑이었다.
성당의 종은 예배시간을 알리고 적의 침입 소식이나 긴박한 상황을 전하는 정보의 수단이었다.
그런만큼 작은 종을 여러개 매달아놓고 요란하게 쳤다.
당연히 은은한 여운이 없다.
반면 우리의 종은 크고 여운이 길다.
굵은 나무로 치기 때문에 사람과 자연을 함께 울린다.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의 "맥놀이 현상"이 갖는 수수께끼와 미학적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문명의 신비한 무늬다.
권씨가 최근 펴낸 "문명은 디자인이다"(김영사,1만3천9백원)를 읽다보면 이같은 사유의 깊이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 책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룩소르,시내산 등 중동부터 로마,프랑스,스페인 등 유럽과 남미의 마추피추,이스터 섬을 거쳐 우리나라와 중국,앙코르와트 등 전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비평이 돋보이는 책이다.
그는 폼페이 최후의 현장을 보면서 "빵문화권에서는 권력자가 제분기를 지배했고 밥문화권에선 물을 지배했다"는 명제를 뽑아낸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우리나라의 창덕궁을 떠올린다.
루이 14세는 엄청난 흙을 운반해 늪을 메워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다.
1천4백개의 분수를 만들기 위해 센 강의 물줄기를 바꿨고,주변 경관도 모두 인공적으로 재편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매일 파티와 무도회를 열면서 귀족들의 참석상황을 체크했다.
귀족들은 가까운 곳에 거처를 새롭게 마련해야 했고 잔치 비용으로 돈을 탕진했다.
그러나 창덕궁은 자연을 최대한 살리고 건물들도 기능에 맞게 앉혔다.
정조(正祖)는 후원 입구에 부용지를 조성하고 사색과 학문의 공간으로 삼았다.
관료들의 주머니를 가볍게 만들기보다 학문을 연마한 신진관료들을 널리 등용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를 이루려 했다.
이러한 세계관과 문명의 차이는 인류의 삶과 권력구조,통치의 방식까지 바꾼다.
저자의 말처럼 "문명은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해낸 디자인 작품"이자 "정신의 유전자 지도"에 새겨진 무늬이다.
풍부한 사진자료와 쉬운 해설로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책이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