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해변으로 사람들이 갑작스레 몰려들었다.

희끄무레한 물체가 온몸을 흐느적대며 모래톱에 바짝 다가왔다.

"오징어냐 해파리냐"를 두고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현지 가이드가 명쾌한 목소리로 해파리라고 하자 잠잠해졌다.

겁이 나서 신발로 살짝 건드려보는 여행객의 짓궂은 장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파리는 유유히 다시 바다속으로 유영해 갔다.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 고개를 들고 바라본 필리핀의 밤바다는 또 다른 정취가 가득했다.

필리핀 남단의 민다나오섬의 한켠에 위치한 다칵해변.

스페인풍의 민속음악을 감상하며 걷는 한밤의 해변은 햇빛에 따라 오묘한 빚깔의 춤을 추던 낮의 바다와는 또다른 맛을 안겨주었다.

한낮의 바다가 강한 몸짓으로 여행객을 잡아끈다면 밤바다는 훨씬 은은하고 멋스럽다.

노을이 주는 넉넉함과 나른함은 휴양지에서 맛보는 여행의 별미다.

하얀모래밭을 보듬듯 살포시 내려앉은 해안선, 수평선과 여행객의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는 석양.

비치의자에 누워 한잔의 커피와 함께 독서에 빠져 있는 유럽인 휴양객의 여유로움이 부럽다.

다칵은 게으른 얼굴로 여행객을 반긴다.

아무런 재촉도 성급함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몸을 맡기란다.

졸리면 야자수아래 해먹에서 남지나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숨 눈을 붙이면 그만.

눈을 뜨면 남국의 바다가 손짓을 한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다시 눈뜨면 바다로...

다칵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건물배치가 이색적이다.

방갈로, 사우나 골프장 등 80여동의 건물은 해변 야자숲속에 몸을 숨긴 채 그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는다.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고서야 볼링장 당구장 가라오케 승마장 우체국 교회까지 갖춘 거대한 시설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 호세 리잘이 말년에 유배를 와서 후학을 양성했던 유서깊은 곳이라 일찍부터 개발된 덕분이다.

이 때문에 유럽인 여행객이 많다.

지난 95년에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다칵에서의 이틀째.

필리핀 전통목선인 방카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나폴레옹 섬으로 떠나는 해양스포츠 원정에 벌써부터 들떠 있다.

통통거리는 방카로 물길을 가른지 1시간.

드디어 눈앞에 하얀산호초 해변을 속살처럼 드러낸 섬이 나타났다.

대롱이 달린 물안경을 쓰고 들여다본 바다속에서는 이름모를 열대어가 산호초 사이를 누비며 희롱이 한창이다.

해변에 오르면 해산물 바비큐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섬마을 누렁이도 용케 냄새를 맡고 찾아와 테이블옆에 한자리를 잡았다.

탁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야자수그늘 밑에서 즐기는 바비큐 점심.

세상 시름이 끼어들 틈이 없다.

필리핀 남단에 자리한 민다나오의 다칵이 40대의 완숙한 맛을 지닌 휴양지라면 중부 비사야군도에 자리한 세부섬의 풀크라는 화려한 20대의 모습이다.

두 곳은 필리핀 바다의 낮과 밤처럼 전혀 다른 느낌이다.

"남쪽 여왕의 도시"로 불리는 필리핀 제2위 도시 세부의 국제공항에서 50분 거리에 있는 풀크라는 세부 곳곳에 흩어져 있는 리조트가운데 최고급형에 속한다.

일찌감치 세부에 진출한 일본자본으로 개발됐다.

37개로 제한되어 있는 객실과 일본인 관광객을 위해 고급으로 꾸며진 객실내부는 갓 결혼한 신혼부부들에게 황홀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대리석 바닥과 객실마다 딸려 있는 개인수영장과 자쿠지는 연인과 가족들만을 위한 공간이다.

리조트 본관을 휘감고 돌아나가는 야외풀에서 수영을 즐기며 수상바에서 음미하는 칵테일은 휴양객의 기분을 한껏 달뜨게 한다.

요트로 한시간 거리에는 해양스포츠의 천국 "보홀" 섬이 있다.

동그란 눈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고 머리를 1백80도까지 돌릴 수 있는 섬의 명물 "안경원숭이"가 여행객을 반긴다.

세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원시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

필리핀 민다나오=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