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백화점의 역사는 지금부터 7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30년 10월 24일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세워진 미스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효시다.

대지 7백30평 건평 3백평 종업원 3백60명으로 당시에는 조선과 만주를 통틀어 명실공히 최고 백화점으로 꼽혔다.

일본 자본에 의해 설립됐지만 한국 최초의 백화점이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 백화점은 철저한 정찰제와 종업원의 친절한 응대로 장안의 명물이 됐다.

지금의 바겐세일이라 할 수 있는 "대매출행사"는 1년에 2차례 2월말과 9월말에 정기적으로 실시됐다.

각 매장마다 특설 코너를 만들어 원가수준으로 팔았다.

특히 미술관은 미스코시 경성지점의 상징이었다.

각종 미술.문화 행사의 본거지였고 신문기자들의 사랑방 구실도 했다.

이듬해인 1931년 9월에는 화신백화점이 등장했다.

일본 자본이 아닌 민족 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백화점이었다.

평안도 용강에서 쌀장수로 자수성가,지물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박흥식씨가 종로 사거리의 화신상회를 인수해 3층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하고 도로변에 최신식 쇼윈도를 설치했다.

화신백화점은 충무로를 근거지로 한 일본 상권에 대항,한국인 중심의 종로상권을 일으킨 계기가 됐다.

1932년 1월에 종로 상권도 일대 전기를 맞았다.

화신백화점 바로 옆 빌딩에 동아백화점이 들어서 화신과 비슷한 내용의 상품을 진열하고 치열한 경쟁을 예고했다.

동아백화점은 판매전략으로 젊은 여사원을 대거 입사시켜 고객유치에 나섰다.

동아의 여사원제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동아는 단기 매출증대 전략에 골몰했고 화신은 장기 전략 아래 느긋하게 대응했다.

승부는 6개월만에 판가름났다.

주먹구구식 경영을 하던 동아는 실패했고 결국 1932년 7월 화신에 동아의 상호와 상품,경영권 일체를 넘기기에 이른다.

한편 충무로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고바야시 가도나카가 1935년 남대문로 2가에 현대식 백화점인 "조지야"를 세운다.

바로 지금의 미도파백화점 자리다.

이 점포는 직영이 아닌 임대백화점이란 점이 특색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백화점 기능은 거의 마비됐다.

전쟁이 끝난 1945년 9월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지점은 동화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지야는 상호를 중앙백화점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중앙백화점은 적산으로 평가돼 6.25 전쟁 이후 새로 문을 열 때까지 백화점 기능을 잃었다.

1955년 2월 동화백화점이 신문지상에 사원 모집 공고를 내고 영업을 재개했다.

그해 11월에는 종로 1가에 신신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50년대 백화점 상권은 중앙백화점이 변신한 미도파가 선두를 지키는 가운데 화신과 신신이 그 뒤를 따르는 삼두체제를 형성했다.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960년대는 백화점 업계도 한단계 도약한 시기였다.

1963년 7월 삼성이 동방생명을 인수함에 따라 동방의 소유였던 동화백화점도 삼성에 넘어간다.

삼성은 동화백화점을 신세계백화점으로 변경했다.

신세계는 67년 국내 첫 바겐세일 행사를 하면서 국내에 "세일"이란 용어를 통용시켰고 이어 69년에는 국내 첫 신용카드인 신세계카드를 발급한다.

이후 10년 가까이 신세계 독주체제가 계속됐다.

그러다 79년 서울 소공동에 롯데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80년대 경쟁체제의 서막을 예고했다.

85년에는 서울 압구정동에 현대백화점이,반포에 뉴코아백화점이 들어섰다.

업체간 접전이 시작된 것이다.

90년대 들어 백화점 업계는 또 한번 커다란 변혁기를 맞게된다.

93년 할인점의 등장,97년 IMF 환란 등 역사적 사건들이 잇따라 터지면서 경쟁력 없는 업체들이 백화점 시장에서 퇴출되기 시작한 것.

이로 인해 백화점 업계는 롯데 신세계 현대 등 빅3 업체가 서울과 지방을 완전 장악하는 과점 체제로 옮겨가게 됐다.

강창동 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