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인 김대중 대통령의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다.

지난 1957년 장면 박사를 대부(代父)로 해 김철규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김 대통령은 훗날 측근들에게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받고서 기분이 나빴다"고 말했다.

토마스 모어는 16세기때 고난 끝에 사형당한 성인.

이를 세례명으로 받은 서운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토마스 모어가 순교 4백년 후 명예를 회복한 사실을 알고 그런 "불만"은 사라졌다.

김 대통령은 오히려 수감생활동안 세례명을 생각하면서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사형을 선고받고도 평상심을 잃지 않은 것은 죽더라도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고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김 대통령이 지난 97년 12월19일 새벽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순간까지 그의 정치역정은 말 그대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이번 노벨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김 대통령의 일대기를 정리한다.

◆ 소년시절 =소년 김대중은 섬에서 태어나 바다를 보고 자랐다.

그는 1925년 12월3일(호적상) 목포에서 뱃길로 3시간 가량 떨어진 전남 신안군 하의도 후광리에서 김운식(74년 사망)-장수금(72년 사망) 부부의 4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소년 김대중은 당시만 해도 전국 10대 명문중 하나였던 목포상업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했고, 졸업후에는 목포상선에 취업해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 정치입문 =김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할 때의 동기는 소박했다.

그의 첫 직함은 민주당 중앙상임위원이었다.

그는 6.25를 겪으면서 "국민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선 바른 정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시작한 생활이 그에게는 줄곧 고통의 연속이었다.

정치 초년시절 그의 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54년 고향인 목포에서 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첫 고배를 마셨다.

이어 강원도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4,5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김 대통령은 이 와중에 장면 박사를 만나 정치를 배웠고, 가톨릭 신앙을 얻게 되었다.

61년 제5대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그마저도 5.16 쿠데타로 의원등록도 못해보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박정희 정권의 등장은 고난의 길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는 김 대통령이 곱게 보일리 만무했다.

5.16후 군정기간에 세차례나 투옥된게 이를 말해준다.

62년 5월에는 현재의 이희호 여사(22년 9월21일생)와 결혼했다.

그 당시 이 여사는 YWCA 총무였다.

63년 11월에는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때부터 그는 야당의 대변인이자 재경통으로 명성을 날렸다.

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평생의 동지이자 경쟁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했으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실시된 70년대 대통령 후보경선에서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 후보에 지명됐다.

제1 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 후보와 맞대결을 펼친 결과는 95만표란 근소한 차이의 석패였다.

◆ 사형선고 =80년 전두환 장군의 신군부에 의해 짧았던 ''서울의 봄''이 무참히 짓밟혔을 때 김 대통령에게는 혹독한 시련이 다시 다가왔다.

계엄당국은 그를 내란음모죄로 기소했으며, 급기야는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각국은 김 대통령에 대한 석방압력을 가속화했다.

국내외의 여론에 밀린 전두환 정권은 결국 사형에서 무기로, 다시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했다.

김 대통령은 지난 82년말 군사정권의 압력에 못이겨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국내의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고,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귀국했다.

2.12 총선에서 압승한 그는 6월 항쟁을 촉발시켰고, 결국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 재기와 수평적 정권교체 =김 대통령은 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한뒤 눈물을 머금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김 대통령은 지난 94년 5월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 "북.미관계 개선을 원하는 북한에 미국의 원로급 정치인을 보내 핵문제를 일괄타결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95년 6월 지자체 선거의 지원유세에 참여, 조순씨를 서울시장에 당선시키는 등 파란을 일으킨뒤 9월 민주당을 떠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97년 12월엔 당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연합으로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후보를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출범시킨 순간 우리나라의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돌입해 있었다.

취임 초기부터 외국을 상대로 외자유치에 적극 나서면서 외환보유고를 늘려 나갔다.

또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북한과 대화의 길을 텄고, 지난 6월15일에는 남북정상간에 6.15 공동선언문을 만들어 냈다.

55년 분단의 역사가 다시 씌어지는 순간이었다.

김영근 기자 yg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