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준 < 국민대 교수 / 경제학 >

우리의 집에는 아무도 없다.

가장은 회사에서 늦게 퇴근하거나 여러 명목의 회식으로 자정이 넘어서야
만취한 상태로 귀가하는 것이 오히려 일상적이다.

다음날, 아니 그날 아침 몽롱한 상태로 급히 집을 빠져 나간다.

아이들도 집에 붙어 있지 않는다.

고3병에 시달리는 입시생은 논외로 하고라도 어린 초등학생들까지도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 피아노 컴퓨터 영어는 기본이고 미술 산수 웅변까지 배워야
하니 밤 10시가 넘어 집에 돌아온다.

주부들은 집을 지키고 있을까.

아니다.

직장 여성들은 직장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전업 주부들도 친구
만나랴, 문화센터 가랴, 쇼핑 다니랴 집 밖을 맴돈다.

낮에도 길이 막히는 서울 강남이 이를 증명해 주지 않는가.

내 집 갖는 것을 그렇게 중요시하는 나라에서 정작 가족 구성원들은 왜
집밖으로만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집안의 문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형에만 집착한 나머지 문화까지도 집밖에서 이루어질 뿐 집안에서 이루어
지는 것은 거의 없다.

모처럼 가족들끼리 모여 있어도 서로의 눈맞춤이나 대화도 없이 TV에만
몰입하는 것이 다반사다.

심지어 제각기 원하는 프로를 찾아 각 방으로 흩어져 버리기도 한다.

가족간의 공통의 대화 소재가 없고 신문 읽는 것이 유일한 독서인 사람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며 저녁을 먹을 날이 언제 올 수 있을까

TV 드라마 중독증에서 벗어나 가끔은 조수미의 오페라 아리아나 판소리
한마당을 들을 수 있는 여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는 지적 호기심, 이런 작은 것들이 너무나 아쉬운
것이다.

손님을 접대할 때에도 집에 초대해 그 집안 특유의 별미를 대접하며 개성
있는 그 집만의 문화를 보여주기보다는 레스토랑이나 갈비집에서 규격화된
음식으로 접대하는 것이 보편화돼 있다.

결혼식 폐백조차 예식장에서 드릴 정도니 우리의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란 하숙집 이상의 역할은 없단 말인가.

대도시 아파트를 바라보면 성냥갑처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늦은 밤, 술에 취해 자기 집을 찾아가는지가 신기할 정도이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그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집안 분위기가
너무 닮아 개성이 없다는 것이다.

비슷비슷한 가구에 거의 유사한 전자제품들, 배치까지도 천편일률적이다.

우리는 일하는 것도 외형주의에 사로 잡혀 내실이 없다.

전 국무총리 한 분은 사석에서 정부에 들어가서 두번 놀랐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줄 몰랐다는 것과 너무나 비생산적인
것에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는 것이다.

국회에 장관이 가면 그 부처가 대이동을 해서 하루종일 허송세월한다.

차라리 담당 국장이 가서 실무적으로 보고하면 국가적으로 얼마나 이득이
될 것인가.

정보화 시대에 단지 열심히 일하는 것이 목표가 돼서는 곤란하며 창조적으로
효율성 있게 일하는 것이 중시돼야 한다.

선진국의 경우 보통 정각 오전 8시 출근, 정각 오후 5시 퇴근으로 양적으로
는 일하는 시간이 적어 보인다.

하지만 근무시간에 개인적인 일이나 전화는 용납되지 않는다.

최근 한 연구에 의하면 기술개발 투자는 선진국 수준이나 그 성과물은
개도국 수준이라는 결과도 있었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이러한 문화적 특성이 현 경제 상황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이 외형적인 것에 집착하고 내실을 기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 자체도 외형적 팽창주의에 경도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화 정책은 우리의 이런 외형적 팽창주의의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결과가
됐다.

조광조의 몰락 이후 이 땅에서 개혁이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고 한다.

모든 의사결정이 이익집단의 로비에 의해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지켜 본 바 있다.

또한 우리는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간섭을 비판하지만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냉큼 정부에 호소하는 이율배반적 나쁜 습관을 갖고 있다.

그러니 정부 개혁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정부의 과보호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시장경제의
원칙이 살아나는 것이다.

문화위기가 경제위기를 불렀다면 지나친 말일까.

외형을 중시하는 집 밖의 문화가 현재의 위기를 불러 왔다면 내실을 기하고
창조적인 집안의 문화가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는 해답이 될지도 모른다.

루소가 이 땅에 환생한다면 "자연으로 돌아가라"가 아니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 jjkim@kmu.kookmin.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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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조세연구원 연구위원
<>저서:그림과 그림값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5일자 ).